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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3-03 (목) 06:44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689    
참고 인내하라 (약 5:7-12)
우리 속담에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병 간호를 하다보면 지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어려움이, 고난이 오래 계속되면 지쳐서 참고 인내하기 어렵습니다. 그 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소망이 필요합니다. 오랜 병도 계속 치료를 받으면, 참고 기다리면 나을 것이라는 소망, 확신이 있으면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을 것이라는 소망이 없으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5장 1-6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악한 부자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그들의 압제 아래 고통 당하는 가난한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이 확실하니, 이 소망을 붙들고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7-8절)고 하였습니다. 앞서 악한 부자들을 부를 때와 달리, 야고보는 지금 독자들을 “형제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들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만하지 말고,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오래 참으라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확신한다면 불평하지 않고, 심지어 복수하려는 생각도 접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는 ‘마라나타’ 혹은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농부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잡초를 뽑으며 밭을 관리합니다. 그러나 곡식이 자라려면 햇빛과 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비(rain) 였습니다. 팔레스틴 땅에는 이곳과 달리 일년에 두 번 정도 비가 온다고 합니다. 이른 비는 주로 10월에 내리며 파종하게 될 땅을 부드럽게 적셔주어서 씨가 싹이 나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늦은 비는 봄인 4월과 5월에 내리며 곡식이 잘 자라 추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이런 비를 기다리는 것이 농부의 인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농부가 씨앗을 심어 놓고 싹이 아직 나오지도 않는데 참지 못하고 땅을 파헤치거나 하면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농부는 없지요. 즉 농부는 추수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신뢰합니다.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농부들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참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말입니다.
바울은 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3-1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재림에 대한 소망이 흐려지면 안됩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이 고난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0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우리는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벧후 3:8).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들 가운데 고난 중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9절)고 하였습니다. 참고 인내하지 못하고 서로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원망하다(stena,zw, grumble)”라는 단어는 잘못을 찾아내어 비난하는 것을 뜻합니다. 겉으로 나타내기 보다 속으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에 ‘원망하다’로 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을 견디지 못하여 낙심하며, 다른 사람들 탓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태도에 대하여 주님이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심판자인 주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데, 곧 들어오실텐데 누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말입니까? 마치 교실 문 밖에 선생님이 계신데 학생들이 교실 안에서 서로 비난하고 싸우고 한다면 선생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정말 문밖에 계십니다. 금방 들어오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원망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겠지요.
그러면서 구약에서 실제로 잘 참고 인내하였던 선지자들과 욥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선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10절)고 합니다.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그 이름으로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였기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한 예로 남왕국 유다가 망하여 갈 때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곳에서 죽게 하려 했습니다. 비참하게 죽게 되었음에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에 대해서나,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드기야 왕이 그를 불러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는 것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을 때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렘 38:20하)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고,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순종하는 모습을, 참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욥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11절)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는 욥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병까지 얻은 후에도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0-21) 하였습니다. 결국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욥을 단련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정금 같게 하시고(욥 23:10), 1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 전보다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참고 인내한 결과입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야고보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동안에 성급하고 경망스럽게 주님의 이름을 빌어 맹세하는 일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12절)고 하였습니다. 고난 속에서 그 고통을 빠져나가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부질없는 맹세를 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 헛맹세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 생명을 걸고’ 라든가, ‘내 머리를 걸고’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진실된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심각한 것입니다. 하늘이나 땅 같은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거짓된 맹세,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물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마 5:34)고 하시면서 땅으로도 말라고 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증거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진실성을 가진 말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도 아무리 힘들어도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12절하)는 의미를 가지고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맹세나 헛말에 대한 죄 정함이 있다, 심판이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울수록 참고 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고, 지킬 수 없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성경은 자주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유는 재림의 약속은 확실하니 거기에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인내합니다. 마음을 굳게 합니다. 그러나 이 소망이 없는 사람은 참지 못합니다.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함부로 말합니다. 결국 주님 만나게 되면 아무런 상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잘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욥을 보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고 하였습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 하더라도 약속은 받지 못합니다. 과거에 고난 받았던 성도들이 잘 참고 인내하여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고 큰 상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곧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으로 끝까지 잘 참고 인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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