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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3-06 (일) 07: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710    
실패하지만 결국은 ... (눅 22:31-38)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다가 넘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우리 안에 죄성이 남아있기에 성령을 받았어도, 때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일어서게 되어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그러한 실패도 다 유익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이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잠 24:16절)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의지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서 그 한계가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앞 문맥에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곧 자신을 팔아 넘길 가롯 유다를 지적하시고 나서 그가 떠나고 나니, 나머지 11제자들이 누가 더 큰 자, 높은 자가 되나 다투는 모습을 보시고 낮아지라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 후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는 빠뜨렸지만 본문 말씀을 하기 전에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절상)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예언에 대하여 시몬 베드로가 제일 앞장서서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만만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은 버릴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진실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감정만 앞세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만, 교만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는 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만 귀담아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자신도 주님을 버린다고 하시면, 좀 생각을 하고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감정에 따라 말부터 앞세워서 다 주님을 버려도 자신은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절)고 하신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두 번 반복해서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안타깝고 다급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그를 처음 부르실 때 게바, 즉 베드로라는 별명을 주시기 전 이름입니다(요 1:42).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반응을 보시고는 모든 제자들을 향해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밀 추수할 때에 키질을 하여 바람으로 가라지와 알곡을 나누듯이 사탄이 그들에게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청구하였다(evxaite,omai, demanded)”는 뜻은 사탄이 하나님에게 요청하였다는 말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사탄이 하나님에게 요청하여서 의인 욥을 시험하였듯이 말입니다(욥 1:7-12; 2:5-6). 사탄이 하나님에게 그가 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 가족이고, 재산이고 다 빼앗아 가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주장하니,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욥은 그 모든 시험을 이겼는데, 제자들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32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계셔서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예: 요 17장). 전능하신 예수님이 기도하시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응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비록 잠시 실패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시고, 돌이키게 되어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을 부어 주신 후에는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사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33절) 라고 합니다. 여전히 자신만만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옆에 계시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게 네게 말하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린다고 한 말씀을 더욱 구체적으로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탄의 영향을 받는 베드로의 교만을 요약하면 세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모습입니다. 정면으로 주님을 반박합니다. 둘째는, 다른 제자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여기는 모습입니다. ‘다 주를 버려도’ 하면서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서 말합니다. 셋째는, 그는 자신의 힘과 의지를 믿고 있음을 봅니다. 자신은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죽더라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될 교만의 모습,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여러 모양으로 무지합니다. 얼마나 자신들이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인지를, 사탄이 얼마나 교묘하며 강한지를 모릅니다. 실제로 잠시 후에 대제사장들이나 관원들, 로마 군인들과 부딪혔을 때에 두려움이 그들을 덮쳐 자신들이 실패하게 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제자들의 배반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35절 이하에서 이제 자신의 죽음 앞에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일러줍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유대 지역으로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 전대(purse), 주머니(bag), 혹은 신(sandals)도 가지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 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없었다고 합니다(35절; 9:3, 10:4). 그 때는 같은 유대인들이라서 그랬는지, 율법에 나와있는 대로 가난한 이웃에게 손 대접할 것을 명해서 그랬는지, 이웃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준 것을 증거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적대적인 상황이라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36절)고 하십니다. 그들이 필요한 것들과 자신들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검도 준비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평화를 원하지만, 이 세상은 사탄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악한 자들을 사용하여 폭력을 휘두르며,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더 큰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37절)고, 이사야서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메시아가 범죄자처럼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죄하신 분이 법을 어긴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고, 체포를 당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고난, 핍박이 올 것이 예언되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되니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핍박이, 고난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검 둘도 갖고 있다고 하니, 예수님이 “족하다(It is enough)” 하십니다(38절). 이 말씀은 검 두자루가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방어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책임은 감당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그냥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할 도리를 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나타났듯이, 이렇게 연약하여 두려움이 많고 무능하여 실패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도무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듯이, 그들의 복음 증거와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군인들이 잡아 옥에 가두어도 계속 담대히 전하며,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 위하여 살다가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하여 그렇게 죽었다고 합니다. 감히 예수님처럼 똑바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 미켈란젤로가 이 장면을 ‘베드로의 시선’이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존재가 그러한 용기와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당연히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성령이 내주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무능하고 유약하게 육신에 져서 실패한 적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갈 2:11-14).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것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부족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도록,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기도하며, 매일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사도 바울에게 배워야 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필요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고 영적 무지를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면 안됩니다.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의 비겁함, 자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 주시며, 성령을 부으셔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사랑, 오래 참으시는 사랑, 그 긍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온갖 핍박과 고통 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죽음 직전에서도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해야 합니다. 삶 전체를, 매 순간을 성령의 온전한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거하면서 부르짖으십시오.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강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담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또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하였고,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고 한 말씀처럼, 오늘도 예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선 줄로 생각할 때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12). 늘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바로 믿고 있는지, 바로 알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내가 믿고 싶은 말씀만 믿으면 안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와 같아서는 곤란합니다. 사탄 마귀의 영향을 받아 나 자신을 믿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주님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여기면 교만한 것입니다. 정말 자만은 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헌데 여러분! 얼마나 좋으신 예수님이십니까?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두려움에, 무지함에 자신을 버리고 다 도망하며 부인하였으나, 부활하셔서 실패한 그들을 다시 찾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혹시 실패하셨습니까? 연약하여 죄에 빠졌습니까? 결국은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만나 주시기 원합니다. 돕기 원합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을, 은혜를 겸손히 받으십시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며, 주님을 더욱 붙들고 살겠다고 결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니 사탄의 공격 앞에 비겁한 삶, 두려워 떠는 삶, 무지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의지하는 담대함, 능력, 사랑의 삶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제하고 근신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한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부활의 주님을 죽기까지 담대히 증거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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