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75,139
오늘방문 : 3166
어제방문 : 2085
전체글등록 : 3,859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5-05-03 (화) 01:4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436    
[5/1/05]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십니까? 행복과 불행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일까요? 명예 일까요? 자식 일까요? 건강 일까요? 아니면, 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이 그저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일까요? 저는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을 모르는 삶은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기쁨, 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누리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우리보다 못한 환경에서도 더욱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면서 주님께 헌신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볼 때, 역시 사람의 환경이나 가진 것, 건강이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로서의 믿음의 깊이는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환경을 초월하여, 주님을 경험하며 얼마나 기뻐하며 살아가는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로 측정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사도 베드로가 성령강림 이후 첫 설교를 하면서, 듣는 이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며 삼천명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 예배 그리고 교제와 성찬과 기도와 찬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기록됩니다. 즉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강림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전에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주님의 교훈, 복음에 대하여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이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령을 깊이 체험한 성도들은 오랫동안 젖어있던 유대주의의 편견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구속사의 중심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체험으로 인하여 사도행전 1장 8절에 있는 말씀대로 저들은 몸과 마음과 생명을 바쳐서 그 일에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들이 성령을 힘입어 기적을 베푼 그 첫 장면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거지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기적과 직접 그 기적을 체험한 자의 변한 모습 속에 은혜 받기 원합니다.

이 거지는 매일 매일의 삶이 절망적이었습니다. 산다고 하기 보다는 하루 하루를 구걸로 연명해 나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루도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였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였습니다(2절). 하루도 건강해 본 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다리를 펴며 걸어 본 적이 없는, 수 많은 사람들은 잘 걷고 다니는데 본인은 친구에게 가건, 시장엘 가건, 마음먹은 대로 갈 수도 없던 자였습니다. 이러한 거지에게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 날도 보통 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사정하여 성전 문 앞에 자신을 두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구걸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이 미문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문은 고린도식 건축양식을 따라 은으로 입히고 금을 박은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금과 은으로 꾸민 아름다운 문 앞에 불행한 처지의 거지로 앉아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불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평생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무엇인가를 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조금도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도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은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가장 많은 자비를 그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장소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세상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을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자신들의 인생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지혜자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그런 자들의 삶은 참으로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요한 앞에 손을 내밀어 구걸하고 있는 이 앉은뱅이의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진 것이 없으나 확실히 가진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니 그의 능력을 힘입어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에는 풍성한 물질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그에게 줄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거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을 허락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먹을 것도 주고, 예수님도 전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먹을 것을, 물질을 의지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알았기에, 물질이 우상이 될 줄로 알았기에 그것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겉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누구도 예외없이 내면 세계로부터 간곡한 탄원으로 교회의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세상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인생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의 책임입니다. 불우이웃돕기와 같이 자신의 이름과 자기 만족을 위하여 동정하는 인도주의(humanitarianism)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거지에게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기도 시간에 만난 체험입니다(1절).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는 기도 할 줄도 모르는 자요 하나님을 모르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의 습관대로 제 구시 즉, 오후 세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다가 만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을 때에 이미 많은 성도들이 성전 안에서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하지 않습니까? 다니엘도, 고넬료도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였음을 우리는 압니다(단 9:20-21, 행 10:2, 22). 이렇게 성도들이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기도가 얼마나 큰 일들을 이루어 내었는지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엘리야의 기도를, 다니엘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기도가 영적체험을, 성령의 역사를,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둘째로, 성전 미문에서 만난 체험입니다(2절). 물론 이 거지는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성전 문에 앉았더라도 그 문 앞에서 기적을 연출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체험하고는 성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3절에 기록한대로 초대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성도들의 믿음생활이 여러 모양의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의인이 합심하여 드리는 간구를,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들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르던 자들도 뜻 밖의 기적을 체험하며 참된 성도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

세째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져다 준 체험입니다(6절). 이름이라 함은 단순히 그 사람을 증명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의 인격, 명예, 권위, 힘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 함은 그 분의 인격, 주권, 명예, 능력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 거지는 걸으며, 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3장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하시기를, ". .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9절) 라고 하셨고, 빌립보서 2장 9-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만이, 죄를 해결해 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그 능력이, 그 체험을,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 이름이 사탄, 마귀를 물리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이 사람은 무엇을 체험하고 기뻐했나요?

첫째로, 구원을 허락하심을 체험하고 기뻐합니다. 나면서 40여 년이 넘도록 앉은뱅이로 있었습니다(4:22). 금이나 은이 그를 앉은뱅이에서 고침을 받는 것보다 낫게 하겠습니까? 그를 걷게 해 주는 것이 더 귀합니까? 먹고 살게 해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달라고 애를 쓰는 우리는 아닌지요. 아무리 내가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산다 할지라도 내 영혼이 썩어져 죄를 먹고 마심으로 결국 지옥에 간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혼이 앉은뱅이로 걷지도 뛰지도 못하면서 먹을 것을, 입을 것을, 안락함을 구한들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그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 낸 후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하셨습니다. 근본적인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큰 기적의 체험은 내 영혼이 구원함을 입은 것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서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천국 시민이 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신 은혜와 주실 은혜를 사모하고 기뻐합니다. 기적을 체험한 그 거지는 성전을 걸어 들어가 뛰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주신 은혜, 체험한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그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는 자가 되었습니다. 거저 받은 것은 잘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거저 받은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늘 잊지 않는 자에게 기쁨이 늘 함께 합니다. 그 은혜를 늘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는 더 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기록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더 큰 은혜를, 선물을, 축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또한 주실 은혜를 바라며 사는 자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세째로, 주님의 일을 맡는 것,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체험하고 기뻐합니다. 본문 10절에 많은 사람들이 그 거지의 당한 일을 보고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고 합니다. 4장 21절에는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며 교회의 부흥을 가져다 주며 전도와 선교까지 하게 됩니다. 분명히 그 은혜를 입은 거지는 주를 위해 일평생 그 몸을 드려 살았을 것입니다.
비슷한 은혜를 입은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로 고백하였습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주의 일을 떠 맡고 온 마음 다해 살았던 바울이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이 주신 일은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영적체험과 아울러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 25:2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즐거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뻐하며 그의 나라 부흥에 동참하는 기쁨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으리라 믿어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줄 수 있어, 주고난 후에 오는 기쁨입니다. 주님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할 때 영적체험의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요즈음은 가짜가 워낙 많아서 진짜가 손해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하고 진짜를 진짜라고 하면 또 욕을 얻어 먹는 세상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일찌기 지성주의와 감성주의가 극단으로 치우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많이 알아야만 하는 것을 극히 강조하며 전혀 성령의 체험은 무시하고 가르쳐 왔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감정에 치우친 성령체험만을 주장해왔던 분들도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성경말씀도 잘 알아야 하고, 성령체험도 늘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 정, 의를 총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실히 알고, 믿고, 경험하고, 오늘도 함께 하신다는 말씀 속에 늘 성령의 체험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체험했던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단지 이지적으로 아는 것과 영적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며 감상하는 것과 그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어 보는 것과의 차이와 같습니다. 정말 삶의 변화와  영혼 속에 우러나는 참 기쁨을 체험하려면 십자가와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경험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기도에 힘씀으로, 교회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를 체험하며 주시는 기쁨으로, 이미 받은 구원을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과거의 영적 체험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의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경험하는 일에 동참하여, 늘 기쁨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255 주일설교 [2/5/06] 우리 하나님은 (6) 한 태일 목사 2006-08-12 2523
1254 주일설교 [2/6/05] 서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임 한 태일 목사 2005-02-09 2522
1253 주일설교 [3/27/05] 부활의 기적이 우리의 삶에도 한 태일 목사 2005-03-29 2516
1252 주일설교 [1/29/06] 우리 하나님은 (5) 한 태일 목사 2006-08-12 2514
1251 주일설교 [7/1/07] 주를 힘입어 담대히 한 태일 목사 2007-07-02 2511
1250 주일설교 [5/13/07] 신앙의 어머니 한 태일 목사 2007-05-15 2505
1249 주일설교 [9/21/08] 고난 중에도 찬양을 한 태일 목사 2008-09-25 2495
1248 주일설교 [8/21/05]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한 태일 목사 2006-08-12 2494
1247 주일설교 [5/6/07] 우리가 믿는 것 8 한 태일 목사 2007-05-08 2493
1246 주일설교 [9/23/07] 부흥하는 교회 한 태일 목사 2007-09-29 2488
1245 주일설교 [2/11/07]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5 한 태일 목사 2007-02-13 2486
1244 주일설교 [12/31/06]한 해를 마감하며 한 태일 목사 2007-01-09 2484
1243 주일설교 [7/2/06] 체험하는 신앙 한 태일 목사 2006-08-12 2482
1242 주일설교 [10/8/06] 오늘 우리에게도 기적이 한 태일 목사 2006-10-09 2472
1241 주일설교 [1/7/07]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1 한 태일 목사 2007-01-09 2469
1240 주일설교 [3/11/07] 우리가 믿는 것 1 한 태일 목사 2007-03-16 2468
1234567891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