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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08-12 (토) 05:0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486    
[7/2/06] 체험하는 신앙
체험하는 신앙 (사도행전 9:1-9)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는 장면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세 군데나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잡혀 그 곳 백성들에게 자신을 대변하면서 22장 6-11절에, 그리고 로마제국의 분봉왕이었던 아그립바 앞에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간증의 말씀으로 26장 12-1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의 사울이 드디어 사도 바울이 되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을 보셨습니까? 영의 눈으로 말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영의 귀로 말입니다. 깨닫고 돌아서서 회개하며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해 보셨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이 사울이 체험한 초자연적인 역사를 살펴보며, 비록 우리는 사도가 아니라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눈으로 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성령님의 역사가 있음을 믿으며 처음 중생할 때 뿐 아니라 계속하여 주님의 은혜를, 성령을 체험하는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바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영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으며, 영의 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주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한 체험입니다. 있어야 할 간증입니다.
        
사울은 어떻게 해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변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울의 회심(conversion)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사울이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지적으로 배운 것은 많은 사람이었으나 영적으로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그 증인들이 그들의 옷을 벗어 사울 앞에 놓았다고 했고(행 7:58), 스데반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행 8:1). 8장 3절에는 사울이 교회를 진멸했다고 했고, 오늘 본문 1-2절에도 주님의 제자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는 이유도 예루살렘에서 핍박에 못이겨 150마일 떨어진 다메섹으로 갔던 신자들까지 잡으려고 나서는 사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가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공문을 받아서 남녀를 불문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습니다(2절). 구약에서 가르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자들의 말만을 믿고 주님이 진정 메시야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부활을 말하는 신자들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참된 증거를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니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잘못된 유대 사상으로 마땅히 신자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렇게 신자들에 대한 미움과 편견으로 가득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이 변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이 주권적인 은혜(sovereign grace)라는 말씀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렇게 굶주린 늑대와 같이 잔혹했던 사울이 순수한 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양들을 섬기고 다스리는 목자의 인격까지 갖추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건을 회상하며 후에 고백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고 하였습니다. 신자된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시고 은혜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도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안 돼’ 하는 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깨달으면 돌아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울이 다메섹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3절). 22장과 26장에서는 정오였다고 기록합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햇빛보다 더 강한 빛이 사울을 둘렀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요 8:12). 땅에 엎드러진 사울에게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 고 하십니다. 신자들을 핍박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핍박한 것이라고 하십니다(5절). 이 말씀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믿는 자를 핍박하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알아듣지를 못하고(22:9), 주님을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섰다고 했고(7절), 사울은 그 강한 빛에 의하여 눈이 보이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고 합니다(8-9절).
이렇게 구원의 은혜는 개인적이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무리들 가운데서 사울에게만 빛으로 나타나셨고, 사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시면서 만나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무리 부모가 잘 믿고, 자녀들이 잘 믿고, 친구가 잘 믿어서 나도 자동적으로 천국행 열차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진실로 믿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슨 환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옆에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 사건이 그로 하여금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신자를 잡으려고 하던 사울은 거꾸로 예수님께 잡힌바 됩니다(빌 3:12).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은혜가 사울같은 사람에게도 넘쳐서 바울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님은 억지로 사울이 바울되게 한 것은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돌연적으로(suddenly) 사울을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면 주님께서 빛으로 오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하) 고 격언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그 동안 계속해서 주님은 사울의 마음을 주장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신자들을 핍박할때 그의 마음의 한 구석에는 죄책감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내적인 고통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로 하여금 그의 생각과 동기가 잘못되어 있음을 꾸짖어 온 것입니다.
또, 주님이 그렇게 찾아 오셨을 때에 사울은 주님께 바로 응답을 하고 돌아선 것입니다. 본문 5절에 주님께서 빛가운데 나타나셨을때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일동안 금식하며 기다린 후에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여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15절). 즉 주께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은혜체험으로 말미암아,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목적이 있어서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나만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를 섬기고, 봉사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 때부터 삼년을 준비하며 훈련을 받은 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변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자존심, 교만, 편견 등을 과감히 버리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물론 오늘날은 사울이 겪은 체험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거나 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에게만 부활하신 주님의 영체를 보이셨습니다(고전 15:8). 이러한 특별계시는 성경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개개인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크신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령체험을, 은혜체험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보고 만나고 깨닫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이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요 1:1). 태초에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했더니 있었습니다(창 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고 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주님과 교제하고 싶으면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외울 때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성령체험을, 은혜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할 때, 순종할 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빛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울도 주님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여 사흘후에 아나니아를 만나서 사명을 받게 되고, 잘 감당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체험하게 됩니다.
사울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무엇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믿기로 회개의 기도를 한없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시면서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11절). 그 동안 신자들을 핍박하며 수없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일들을 낱낱이 고했을 것입니다. 지은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간구의 기도가 없이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역사를 일으킵니다. 영혼 깊은곳에서 우러나는 찬양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중에 같혀있을 때에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양으로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린 사건을 기억하십니까?(행 16:25-26). 무수히 많은 시편의 다윗의 찬양을 기억하십니까? 성경에 얼마나 많은 예가 있습니까? 간절한 기도, 간구, 찬양이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성령체험을, 은혜체험을 하게 합니다.

세째로, 봉사와 전도로 체험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며 복음을 전파할 때에 수많은 기적과 표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전도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이 주를 위해 봉사할 때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몸된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드릴 때 성령께서 역사합니다. 사랑을 전할 때 만납니다. 전도하면 여러분이 그 사랑을 더욱 간절하게 깨닫게 되고 은혜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사울과 함께 있던 자들은 주님을 보지 못한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무슨 소리가 났지만 듣지를 못했다는 것은, 오늘날도 어떤 이는 듣고 보고 깨달으면서도 어떤 이는 듣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다는 뜻입니다. 영의 눈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이런 만남이 없었다면, 또 계속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보셨습니까? 들으셨습니까? 깨달아 졌습니까? 변하셨습니까?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부르심의 형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주님과의 만남은 있었어야 합니다. 아니 계속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되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력이 있는, 살아 움직이는 종교입니다. 신비한 것입니다. 그 신비를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자주 자주 체험하여야 합니다. 매일 매일 체험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주권적인 은혜로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있는 삶을 삽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즐거운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래서 부르신 그 목적, 구원해 주신 목적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섬김, 봉사와 전도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체험을, 은혜체험을, 사랑체험을 계속하고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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