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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3-25 (수) 20:4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01    
[3/22/09]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도행전 21:27-39)
우리 인생길에서 세찬 풍랑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하며 비난을 받고 있을 때, 정말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절망 가운데 낙심하고 다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나요? 아니면 비록 상황이 그렇게 열악해도 조금도 불안해 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고 담담히, 조용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나요? 마치 바다 위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깊은 바닷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다니는 물고기처럼 사나요?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목적이 분명했던 바울이었기에 겸손히 교회 지도자들의 말을 순종하고 나실인의 서원 예식을 결례식과 함께 하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며(17-26절), 우리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노력과 바울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대로(11절) 바울이 결박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바울은 로마 군인들에게 결박을 당하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끌려 나아가 엄청난 매를 맞았습니다(31-32절). 바울을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 폭도들(mob)을 생각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열정, 종교적 열정이 대단했기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도 바울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 자신의 동족들의 영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기에 둘은 충돌하고 만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하나됨과 유대인들을 향한 전도를 포기하였더라면 이런 충돌은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둘 중에 하나는 잘못된 신념에서 나타난 그릇된 열정이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유대인 폭도들이 그런 열정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믿지만 율법주의에 얽매어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바울에 대하여 잘못 오해하고 있기에, 지도자들이 타협안을 내고 바울이 그 제안대로 행하였기에 좀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그냥 넘어가려는 믿는 유대인 무리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무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타협안 자체도 부인하고 지금 막무가내로 소동을 일으키며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밀어 부치니 거의 다 넘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27-28절)고 하였습니다.
사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들은 소문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충동하며 바울을 정죄하는 그들입니다. 이는 과민반응이요, 과잉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사는 그들이 바울 때문에 유대인들 중에 참 신자로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다가는 자기들의 존재자체가 불안해지니까, 신념이 무너지니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자신들의 약점을 숨기기 위하여 극성스럽게 반응하며 비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들의 위상을 깎아내고, 성공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니 상대방의 약점 아닌 약점을 들쳐내어 비난하려는 행동이지요. 우리 주위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역자를, 형제 자매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질투하는 반응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소문만 가지고 감정적으로 흥분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비난의 내용은 거짓이었습니다. 진실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에서 비롯된 유언비어라고 할 수 있지요. 29절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간 줄로 생각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성전은 네 부분으로 되어져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성전 내의 이방인의 뜰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그 너머 성소나 여인의 뜰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에는 약 1m 높이의 난간이 있었고, 여러 곳에 ‘이방인 진입시에는 죽일 것’이라는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소에 들어간다면 즉각 사형에 처했습니다. 로마 정부도 유대인의 성전에 관한 법을 인정했습니다. 로마인이라 할지라도 성소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헌데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소에 들어가게 했겠습니까? 만약에 그러했더라면 성전을 관리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미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저 바울이 예루살렘 성내에 드로비모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본 사람들이 나름대로 추측하였거나, 드로비모를 목격한 장소를 성전 안이라고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을 헛된 소문으로 망치려는 누명입니다. 그런데 사실(fact)을 알아보지 않고 비이성적인,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선동에 넘어가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입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0절)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군중들입니까?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지금 바울을 쳐 죽이려는 폭도로 변합니다. 별 것도 아닌, 있을 수도 없는 엉터리 소문이 큰 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바울은 대중의 선동에 의해 죽음의 위기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말이라는 것이, 헛소문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선동정치에 쉽게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수년 전에 동두천에서 여자 중학생 두 명이 사고로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은 것을 기회로 전국적인 반미운동이 벌어지면서 촛불 데모가 탄생하게 되었고, 재작년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소고기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잡아 보내는 것이라서 그 고기를 먹으면 병이 걸린다는 TV 프로그램의 엉터리 취재로 말미암아 촛불 데모가 더 극성을 부리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런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선동은 어느 한 두 사람에 의하여 조종되기 쉽고 나중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 하더라도 거기에 사탄의 바람이 불면 결국 대형 화제나 큰 재앙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슨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냥 어설프게 듣고 확인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이 당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의 근본 문제는 율법주의에 있었습니다.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인데, ‘율법주의’는 큰 문제이며, 너무 잘못된 것입니다. 이 잘못된 진리에 열정을 품으니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자꾸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은 자기 의를,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킨 것을 자랑하며 남이 지키지 못하면 비난하지요. 하지만 율법 위에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연약한 부분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법 위에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 때문에, 사랑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법을 다스리는 것이지요.
설교자도 자기 의를, 자기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고 하면 사람의 영혼을 살리거나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말씀을 전해야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치유하고, 세우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2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 전체가 이 폭동에 의하여 요란하게 됨을 듣고 로마 군대의 천부장 장교가 나섭니다. 이 사람은 23장 26절에 글라우디오 루시아 라고 그 이름이 나옵니다. 절기 때에 소요를 예방하고 진압하기 위하여 그가 이끌고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던 군대를 개입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백부장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가자 그제야 폭도들이 바울에게 하던 매질을 그칩니다. 이 천부장이 바울을 결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누구며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자 사람들마다 말이 다릅니다(34절). 진실이 아니니까요. 다 소문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무리들은 바울을 죽이라고 외치며 그 장교를 따라갑니다(36절).
그 장교가 바울을 영문 안에 들어가게 한 후에야 바울이 입을 열어 장교에게 말 좀 할 수 있겠느냐고 유창한 헬라말로 했더니 듣고는 어떻게 네가 헬라말을 아느냐고 합니다(37절). 그러면서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사천명의 테러리스트를 데리고 반란을 일으키어 애굽으로 갔던 자가 바로 너냐고 묻습니다(38절).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50-60년 벨릭스(Felix) 총독 시절에 그런 극렬 테러리스트들이 소요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자신은 유대인임을 밝히며,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데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39절)고 부탁합니다.
참으로 담담한, 의연한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이 큰 소란 중에도 그는 별 요동이 없습니다.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동족 유대주의자들의 열정으로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모습이었기에 이 폭동들의 만행을 그대로 받습니다. 어쩌면 그들을 이해하면서 불쌍히 여겼겠지요.
아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는 오히려 그 순간에도 폭도와 다름이 없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이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하였겠습니까? 어떻게 하여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담담히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고 할까요? 그 안에 있는 열정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라와 의를 위한 바른 열정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열정이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열정은 자동차의 엔진과 같습니다. 자동차가 달리게 하는 중요한 엔진 말입니다. 엔진이 없다면 어떻게 차가 가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일하게 합니까? 그냥 타성에 젖어서 사는 것입니까?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까? 자식에 대한 열정으로 삽니까? 이 세상 것에 대한 욕망에 대한 열정 때문에 사십니까? 돈 버는 재미로 사십니까? 아니면 취미생활에 대한 열정으로 사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정, 그의 나라와 의에 대한 열정,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열정, 내 형제 자매들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까? 사도 요한이 노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주님의 계시를 받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노라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고 하였습니다. 열정이, 열심이 없이 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였습니다(계 3:16). 기왕 예수님 믿는데 좀 확실히, 뜨겁게 열심을 가지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간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엔진을, 열정을 분별해 보시기 원합니다. 잘못된 신념으로 바울을 그렇게 핍박하며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이 가졌던 열정인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정인지 말입니다. 때로 나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정이라고 착각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열정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을 기쁘게 하는 열정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열정이 과민반응으로, 형제 자매를 비난함으로 나타난다면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진실이 아닌 거짓이나 율법주의자가 되어 법을 지켜 자기 의를 나타내고자 함이 그 과민반응이나 비난의 근거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다르게 묻는다면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오늘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게 합니까? 찬양하게 합니까? 말씀 듣게 합니까? 십일조와 헌금하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교회를 섬기며 주의 일을 하게 합니까? 그런 것에 대한 열정이 전혀 없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만, 조금이라도 그런 열정이 있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의 엔진을 켜서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까?
또 한 가지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담담하고 의연하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주님을 향한 바른 열정으로 그렇게 했다면 그러한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해답은 오직 주님의 은혜 입니다. 그 크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22장에 폭도들 앞에서 그 은혜에 대한 간증을 하게 됩니다. 즉 엔진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목자가 되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했습니다(시 23편). 또한 어두운 암흑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1-2)라고 고백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19-2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너무 힘들 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상)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불러주심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지고 성령의 인을 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심도 은혜요, 매일 순간 순간마다 지켜주심도 하나님의 은혜 인줄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사탄이 기뻐하는 열정으로 늘 잘못을 범하며 살겠지요. 주님을 진실로 믿기 전에 그런 모습이었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그 은혜로 여러분의 심령이 충만해질 때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정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심한 풍랑이 일어도, 어떤 비난이 있어도, 어떤 핍박이 있어도 깊은 바닷속의 물고기처럼 담대히, 의연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말입니다. 찬송가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 찬송이 여러분 모두의 진솔한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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