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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9-24 (월) 06:19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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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22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전 5:1-8)


목사로서 종종 무거운 죄책감을 가지고 찾아오는 교인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신실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어쩔 수 없이 연약하여 실수로 지은 죄에 대한 용서와 치유를 받도록 인도하면서 사죄의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은 목사로서 특권이요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지은 죄에 대하여 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했기에 죄를 짓고도 금방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지은 죄에 대한 수치감이나 죄책감이 거의 없는 분들을 만나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그보다 더 충격스러운 일은 ‘제가 그런 말과 행동을 했지만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큰 죄가 되겠습니까?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데요’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둔감해진 경우입니다. 아니 더 심한 경우는 자신의 죄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하여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교회에 해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런 행동에 한편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완악해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분은 이미 교만으로 가득차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천사들이 아닙니다. 다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탄, 마귀의 장난으로 조금만 자극을 받으면 언제든지 죄의 불길이 솟아 주위를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죄와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죄에 감염이 되어 정결한 신부의 모습이 아니라 불결한 창녀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멀쩡한 사람까지 병들게 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병 고치러 병원에 갖다가 도리어 병에 걸려버리는 경우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죄에 둔감한 교회, 죄의 병균이 퍼지고 있는 교회였지만 아무도 병을 고치려 하거나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만하여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에 바른 권징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성도)는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해야, 정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교회가 분열되어 있는 것이 그들의 교만 때문이며,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보다 세상 지식과 지혜로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며 왕 노릇 하는 모습을 아비의 심정으로 꾸짖었던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들려오는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1절) 여기 “음행(immorality, fornication)”이라는 원어에서 나온 말이 포르노입니다. 문맥상 여기서 말하는 음행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어쩌다가 한번 창녀와 관계를 갖는다던가, 남의 아내나 남편을 범한 정도의 죄가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범하지 않는 음행을 지적합니다. 교인 가운데, 아마도 지도자 중 교회에서 꽤 힘을 가진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아비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근친상간이지요. 실제로 당시 로마법에도 이 근친상간의 죄는 철저히 금지해 놓은 것으로서 어기면 중한 벌을 받도록 했습니다. 바울이 그 사람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아비의 아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계모, 즉 아버지의 후처나 혹은 첩과 산다는 것입니다. “취하였다”라는 동사가 현재형이니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좀 좋게 생각하면 아버지가 죽은 후에 어쩌다 보니 그런 관계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만약 아버지가 살아있는 데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과 같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멀리 있는 바울에게도 그런 소문이 들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 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2절)는 것입니다. 교인 가운데 아니 어쩌면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떻게 교회가 애통해 하지 않고, 징계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6절). ‘우리는 그런 음행을 하고 있는 자도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이 풍성합니다. 누구나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다 용납합니다, 주님 사랑으로 다 덮습니다’라고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보다 좀 약한 음행은 얼마나 용인되어서 만연해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고린도교회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고린도 도시 전체가 음란한 사람들로 가득찬 곳이었기에, 성적으로 타락한 문화 속에 젖어서 살다 보니 교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음란한 죄에 대하여 둔감해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죄의 문화가 교회에까지 영향을 주고, 교회가 그렇게 세상에 물들어 간다면 이미 교회로서 역할을, 사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교회는 죄인들이 가득찬 곳이지만, 이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고 말씀과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대로 죄를 가진 채 그저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사랑으로 다 덮어준다고 생각한다면 한참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 죄 가운데 살았더라도 진정으로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 그 죄를 버릴 때 과거의 죄를 불문하고 그를 형제로, 자매로 받아주는 것이지, 아직 자신이 죄를 버리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를 받아주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니 적어도 그 죄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태도를 보일 때, 옆에서 함께 기도로 도우며 힘쓰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놔두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기도 하지만 거룩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 교인 한 사람을 잃기 싫다고 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사람 중심의 교회지 하나님 중심의 교회는 아닙니다.
   바울은 왜 그런 음행에 대하여 교인들이 애통해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성도)는 죄에 대하여 예민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물론이거니와 교인들이 항상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만들고, 자기 안에 있는 죄성에 대하여 경계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와 싸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믿는 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죄가 교만(우상)에 빠지는 것과 성적인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부분에서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부부 사이를 더 깊게 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사탄, 마귀는 그것을 사용하여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지속적으로 서로가 긴장하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미 내 사람이 되었는데 뭐’, ‘몇 년을 함께 살았는데 뭐’ 하면서 무관심하고 안일하게 생각하시면 부부 사이뿐만 아니라 가정이 완전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그런 음행을 범하고 있는 사람을 권징하여 출교시키라고 명합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을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3-5절)고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회 안의 징계 절차를 밟은 후에 출교하는 것이었습니다(마 18:15-20). 바울이 영으로 함께 한다는 말씀은 바울의 마음이, 정신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판단하기에 이미 아비의 아내와 함께 사는 사람은 교인도교회가 마땅히 징계하여, 사탄에게 내어주어 육신의 고통을 받다가 회개하여 그 영혼이라도 구원을 얻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권징의 목적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의 잘못을 흉보거나, 비난하며 벌을 받는 것을 보고 고소해 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은 전혀 그런 비슷한 죄에 빠질 가능성이 없는 천사처럼 교만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죄에 빠졌을 때에, 벌을 받을 때에 깊이 근심하며 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고후 7:9-10). 겸손한 사람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비슷한 죄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죄에 빠진 형제나 자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나중에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면 그가 부끄러움 없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왜 교회가 그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교인을 권징하여 출교해야 합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너희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절)라고 말입니다. 우리 안에 악한 누룩을 내버려 두면 결국 교회에 전염이 되어 온 교회가 병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 안에 바이러스나 병균이 들어오면 몸 안에 저항력이 스스로 물리치던가, 아니면 항생제를 사용하여서 그 균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건강하다고 자랑해도 몸 전체가 병들어 결국 죽게 됩니다. 암이 왜 무섭습니까? 딴 곳으로 전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까워도 암 세포가 있는 곳뿐만 아니라 암 세포가 없는 그 주위까지 다 잘라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죄가 용납이 되면 결국 교회 전체가 망가집니다. 당시에는 겉이 말짱해 보여도 속은 썩어 들어가서 시간이 흐르면 겉까지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심령 한 사람 붙잡겠다고 그냥 두면서 온 교회를 망하게 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죄를 죄라고 이야기하면 그저 싫어하기만 하고 그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미 주님과는 멀어진 영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살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죄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며(데살전 5:22), 증오하며,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이 세상에서 좀 가난하게 살고, 좀 어렵게 살고, 고생하며 쾌락을 누리고 살지 못해도 대충대충 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이 단호하지 않으면 결국 죄와 타협하게 되며,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부활의 능력을 매일 같이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유월절 신앙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7-8절)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미 출애굽을 한 누룩 없는 자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미 중생함을 입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인이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애굽의 묵은 누룩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과 무교절에 누룩이 없는 떡을 먹도록 했습니다. 영적인 의미는 믿기 전의, 애굽에서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라는 뜻입니다. 애굽을 떠날 때 노예의 사고방식, 가치관을 아예 다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는 스스로 아무 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면 포기하고 조금만 어려우면 원망하는 것이 노예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을 청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에서 그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며 대들었습니다. 나중에 40년이 지난 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여리고 성을 앞에 놓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애굽의 수치가 그들에게서 굴러갔다고 하시면서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고 지어 준 때에야 애굽의 누룩을 버렸습니다(수 5:9). 그리고 유월절을 거기서 지켰습니다.
   우리도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어야 합니다. 누룩 없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세상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는, 묵은 누룩을 버리는 기회를 이미 과거에 가졌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 예배 중에라도 완전히 다 버리기를 축원합니다. 새 사람이 되기 전, 자신의 옛 사람을 철저하게 죽이는, 옛 사람의 사고방식, 가치관,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유월절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매일 영적인 명절, 즉 유월절을, 무교절을 지키라고 합니다. 묵은 누룩인 믿기 전의 사고방식, 가치관, 습관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은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죄를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죄도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 받을 수 있으니까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올바른 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 먹지 않으면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 번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죄로 가르치고, 구별된 자로서 의를 추구하는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받지 않으면 누룩이 번지게 되어 있습니다.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은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말합니다. 주님의 교회로 모이는 성도들의 순수한 동기와 순수한 행동을 말합니다. 좀 재미는 없고 딱딱한지 몰라도 변화 받은 새 사람으로서 순결하고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참된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와 문화, 가치관을 만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아직도 묵은 누룩이 없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옛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믿기 전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생활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며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을 생각하고 다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자만심을 버리고 우리 자신도 성적이 유혹에 자유롭지 않음을 기억하며 늘 경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영적인 명절을 지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기에, 늘 가까이하면서 죄에 대하여는 민감한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죄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어떤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늘 무장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순결하고도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만날 날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 묵은 누룩을 경계하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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