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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5-06 (월) 09:4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01    
영적 은사 (5) (고전 12:21-31)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대부분이 다 따로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혼자 하기를 원합니다.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쩌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니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 4:9)라고 책임회피를 한 후부터 사람들은 이웃에 대한 아무런 책임감, 의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서로 돕고 함께 일한다는 개념을 잘 모릅니다. 다들 자신들이 똑똑하고 잘 났기 때문에 옆의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식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옆 사람도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각 지체로서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함께 일할 줄을 모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 안에는 영적 은사들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주님의 영적인 몸으로서 하나됨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12절부터 20절을 가지고 설명드렸습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20절)고 결론을 내리면서, 교회 안에 여러 지체들이 있지만, 몸은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교회가 하나됨의 공동체임을 강조하면서, 각 지체가 서로 필요한 상호공존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21절)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몸인 교회의 지체들을 우리 몸의 각 기관의 비유를 들면서 설명합니다. 눈이 손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머리가 발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눈의 역할을 하는 지체가 손의 역할을 하는 지체더러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발의 역할을 하는 지체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손이 없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발이 없이 어떻게 움직입니까?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중에 늘 12제사들과 함께 다녔고, 사역을 가르치며 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늘 옆에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나 실라나 마가나 누가와 같은 사도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어떤 지체의 은사가 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남이 기준이 되어 그렇지 못한 어떤 지체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22-25절) 하였습니다. 바울은 심장, 허파, 간 등 몸 안에 있는 기관이 손이나 발과 같이 몸 밖에 있는 기관보다 약하게 보이는 것 같으나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합니다(22절).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기관들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뼈들로, 근육들로 보호를 받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눈에 보기에 아름답지 못한 그런 지체는 그 자체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게 치장할 필요가 없지만, 손이나 발, 얼굴이나 다리, 히프 등 덜 중요한 기관은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것입니다. 멋을 내고 옷 치장을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은사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기 때문에 스스로 드러내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체들에게 더 많이 드러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들도 다 필요한 지체들이기 때문에 더욱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체들이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게 하여 서로 같이 돌아보도록 해야 교회 안에 분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데살전 5:14)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돕고 서로 섬기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지체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느 지체도 우월감,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하여 어찌하든지 교회에서 분쟁이 없도록, 분열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각 지체가 서로 잘 움직여 주어야 정상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쟁이 일어나서 어느 한 지체라도 잘 움직여지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지체들 사이에 은사 문제로 마찰이 심했고, 서로 필요 없다고 했기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교회에서 가장 좋은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은사입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찾아가 권면하며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은사입니다. 교인들이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분쟁이 생깁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잘 싸우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대부분 성숙한 어른의 신앙이라면 다른 사람이 철없이 굴어도, 실수를 해도 용납하며 자랄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서로가 미안하다는 말을 잘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 가운데 다른 사람을 잘 세워주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많으면 교회가 사랑이 넘치고, 참으로 은혜스러운 교회가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6-27절)고 참된 공동체, 영적인 주님의 몸인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몸 안에서도 어떤 기관이 잘못되어 고통을 받으면 온 몸에 열이 나고 고통을 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 어느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온 교회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느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이어서 은사의 순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28절)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중요성의 차이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뇌나 심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치명적인 기관들이 아닙니까? 그것과 비교하면 손이나 발은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나 발이 다친다고 하여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이 은사들이 없으면, 망가지면 치명적인 것들이 더 중요하기에 그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도의 직임을 가진 자와 두번째 은사 선지자의 직임을 가진 자는 세 가지 근본적인 책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약교회의 기초를 놓는 것이며(엡 2:20), 다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놀라운 능력의 기적을 베풀면서, 병을 고치면서 그 말씀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회의 모든 신앙고백은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의 가르침 위에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교훈, 새로운 계시를 주장한다면 이단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개인적인 체험이 아무리 생생하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보다 더 중요시 여기면 문제가 됩니다. 요즘은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같은 이론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의 말이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지려고 합니다. 너무 잘못된 현상입니다. 성경은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은사인 교사는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직임을 말합니다. 오늘날 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이나 전도사와 같은 말씀 사역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은사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도력이나 행정 관리를 하는 것보다 설교와 성경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 사역에 문제가 생기거나 약화되면 교회는 서서히 죽어갑니다.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목사는 정말 이 말씀 사역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교회가 균형 있게 서지 못하기 때문에 돕는 은사와 다스리는 은사, 각종 방언 말하는 은사 등을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고(8-10절 강해),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오늘날은 능력의 은사나 병 고치는 은사는 없습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 능력이나 병 고치는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섬기는 가운데 병이 낫기도 합니다. 또 의사나 약사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약이나 의술만을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도 바울의 초점은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29-30절)고 한 말씀에 있습니다.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몸에 뇌나 심장이나 간이 중요하다고 다 뇌나 심장이나 간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은사를 가지고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받은 은혜, 은사를 가지고 한 마음으로 서로 필요함을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섬기는 것이 아름다운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가정이 중요하고, 직장과 사업체에서의 삶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고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말 없이 묵묵히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빛이 아무 소리 없이 어두움을 비추고, 소금이 아무 소리 없이 맛을 내고 음식물이 썩지 않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렇게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일으켜 세워줄 자들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 다가가서, 자기 집에 초청하기도 하며 대접을 하고 삶을 나누는 것을 기쁘고 즐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혼자서 하게 되면 개인주의가 되고 맙니다. 함께 Teamwork 을 해야 합니다.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이 공동의 비전을 가지고, 공동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한번 나와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만 알면 너무 잘못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해서는 믿음이 자라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교회, 하나님 나라 확장의 비전을 가지고 모이는 교회에서 자주 모여서 말씀 아래 뿌리를 내리고,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자기 시간을 포기해야 하고, 자기 개인적인 생활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또는 서로 손해주지도 말고 희생하지도 말고 각자 생활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는 것도 성령을 받은 마음이 가지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31절)고 하면서, 이어서 그 유명한 사랑장인 13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영적 은사 문제를 다룬 12장 전체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실 때(11절), 성도들은 그저 감사하며 받은 은사, 직임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여러 은사들 보다 더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주신 은사들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더 좋은 은사를 달라고 떼 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미 은사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아래 그 뜻대로, 교회 안에서 잘 쓰임을 받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성도들과 잘 화목하여 조화를 이루면서 감당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좋은 길, 방법인데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후에는 말씀을 붙들며 성령의 힘으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신 은사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서로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함께 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한 가족으로서,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지체와 함께 일하고 함께 섬기지 않고 제멋대로, 나홀로 일하며 살아가는 지체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암세포가 분쟁을 일으키며 건강한 세포마저 암세포로 만들어서 몸을 죽이는 것처럼 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중에 우리 주님께서 물으실 날이 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신 은사를 가지고 사랑으로 힘써 돕고 섬기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칭찬 듣고 많은 상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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