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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5-03-30 (월) 09:1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20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마 21:1-11)


아마 이 세상 역사상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생애(life)는 예수님의 생애일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연대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점으로 주전(B.C.)와 주후(A.D.)로 갈라졌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이었습니다. 바로 그 일주일의 시작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간략하게 설명드리면, 오늘 이 세상 모든 성도들이 종려주일로 지키는 바로 그 첫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던 날로 시작하여, 이어서 두 번째로(첫번째는 요 2:13절 이하)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옥같은 천국 비유와 세상 종말에 관한 마지막 교훈을 주시며,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목요일 밤에 체포되셔서 심문 당하시고, 금요일에 수난 당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절에 살아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이 너무 중요하기에 4복음서는 많은 비중을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을 사셨습니다. 그 중 사생애(private life) 30년을 제외하고, 자신 스스로 메시아임을 나타내 보이신 공생애(public life)의 사역은 3년이었습니다. 그러나 3년 가운데 이 마지막 한 주간의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약 1/4(21-28장), 마가복음은 1/3(11-16장), 누가복음은 약 1/5(19:28-24장), 그리고 요한복음은 1/2(12-21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전부 통틀어 4복음서의 전체 89장에서 29장 반 정도, 삼분의 일을 주님의 마지막 한 주간,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부활하실 때까지의 사건과 교훈을 적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 마지막 한 주간이(정확하게는 8일) 예수님의 생애의 절정(climax), 아니 이 세상 역사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창조 이전에 계획해 놓으셨던 것이며, 죄로부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사복음서에서만 강조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도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고 하였으며, 또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사”(고전 15:3-4) 라고 복음을 요약하면서,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맨 마지막에 자기에게도 보이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 15:5-8). 이 부활은 사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부르짖었던 설교의 중심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사람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고 선포하였습니다.

저는 2015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생애 가운데 이제 드디어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온 세상 앞에 등극하시는 장면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때가 되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제물인 어린 양을 비롯한 짐승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그 시간에 자신 스스로 유월절 참 어린 양으로서 제물이 되기 위하여 입성하십니다. 당시 유월절에 약 250만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1-2절)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근교인 벳바게는 베다니의 다른 이름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맞은편 마을에 나귀가 매인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사역처럼 그냥 걸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수도 있었을텐데 왜 굳이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였을까요? 이 일조차도 바로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진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서 였습니다(4절). 주전 500년 경에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되어진 말씀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는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아,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이는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왕 위에 오른다는 말씀입니다. 화려하게 등극하는 세상의 왕들과 달리 우리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시기에 그렇게 왕 위에 오르십니다.
1838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등극할 때에 큰 루비와 사파이어 보석을 309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빙 둘러서 박혀있는 왕관을 쓰고, 여왕의 홀에는 더 큰 516.5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었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아마 화려한 마차를 타면서 그렇게 대영제국의 왕 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왕과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참 하나님이신 분께서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자체가 겸손을 나타내시는데, 주님의 이 땅에서의 삶 자체도 죄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으로서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아니 죽는 순간까지도 겸손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경은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교만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갈등은 다 교만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나귀 주인과 나귀 새끼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제자들을 시켜 주인에게 매여 있는 그 나귀들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실 때에,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니”(3절) 하셨습니다. 정말 그대로 그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즉시 보내어 주었습니다. 주인이 믿음이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주로, 왕으로 알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가 쓰고 싶은 만물이나 사람을, 쓰고 싶은 시간에, 쓰고 싶은 장소에서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는 주님이시오, 왕이십니다. 인생은 이러한 주님의 쓰심에 다만 순종할 청지기인 것입니다. 주께 쓰임 받는 자체가 축복이지요. 이유는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저 주인인양 착각하고 사는 것이지요. 우리 생명을, 우리 시간을, 우리 건강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주께 쓰임을 받을 때 비로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소유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인의 뜻을 좇아 나귀를 풀어 주께 드렸을 때에 그 나귀의 존재 의의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에 즉시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시간이, 건강이, 물질이, 자녀들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즉시 순종하고 드릴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그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한편 그 나귀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를 나귀로 비유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에게 얽매어 있던 나귀, 그 주인이 풀어주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었던 나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니 풀려졌습니다. 주인이 놓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주께 쓰임 받기를 사모하면, 묶인 어떤 것으로부터도 풀어주십니다. 죄로부터, 욕심으로부터, 열등감으로부터, 질병으로부터,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풀어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위하여 쓰기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묶인 것을 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소용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 묶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니까 핑계거리를 주실 뿐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불쌍히 여기셔서 나중에 주님 만났을 때에 ‘묶여 있어서 주의 일을 못했습니다’라고 핑계거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하찮은 사랑을 받아서 되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 위하여 쓰임 받는 일군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묶인 것에서 풀려나고, 형통케 하시는 축복 속에 마음껏 쓰임 받다가 부르실 때에 주님 앞에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안장 대신에 자신들의 겉 옷을 그 위에 얹어 타게 하시고(6-7절), 어떤 무리들은 입고 있던 옷들을 길에 펴서 만왕의 왕이 입성하시는 길을 준비하며, 또 다른 이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폅니다(8절). 그러면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절)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라고 하였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찬양은 사실 시편 118편 25-26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을 하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메시아)로 이제 그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오심으로 믿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어쩌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장사 지냄을 기념하기 위하여 향유 옥합을 깨어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 주었던 것처럼 아주 적은 소수의 무리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대부분의 군중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지,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찬송하는 진정한 내용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의 사람들이 소동하여 묻습니다(10절).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 하니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11절)고 하였습니다. 맞는 말 같지만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선지자로, 다른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워줄 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호산나 찬양은 로마제국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나, 위선, 종교적인 겉치레 등으로 참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영안이 어두워져 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여’ 혹은 ‘이스라엘의 왕이여’ 부르며 따라 가더라도 이제 곧 잠시 후에 자신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실 메시아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 자신들의 기대와는 너무 어긋남을 보았을 때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돌변했던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눅 19:14)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가르쳐 주어도 듣지를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부와 건강, 성공과 행복, 혹은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군중들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들을 채워주실 분이라고 믿으면서 예배를 드립니까? 그래서 마치 이 군중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주님을 버리며 떠나갔듯이 내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을 버리고 떠나시겠습니까? 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죄를 지적해 줄 때에 귀를 막거나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고 돌아서겠습니까?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십니까? 여러분 삶의 주인이십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그렇게 믿으신다면 지금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향하여 정말 ‘주님’이라고 부르신다면, 그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못 알고 부르시면 오늘 본문의 군중들과 별 차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 아시면 대단히 착각하고 잘못 믿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신다면,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희생당하셔서 영원히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구세주(Savior)이자, 여러분의 삶의 주인(Lord)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온 세상 만물의 창조주시며, 우리 한 사람 개개인을 창조하신 분, 그리고 구원하시는 분, 만왕의 왕이신 살아계신 주님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도록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 예수님께서 간섭하시도록 내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겸손과 순종이지요. 그럴 때에 묶인 것이 풀어집니다. 그래서 주께서 필요하다고 할 때에는 ‘언제든지 쓰십시오. 무엇이든지 쓰십시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라고 자신을 드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용하셔서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한 몫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합니다. 그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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