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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11-18 (월) 07:5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25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6)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 혹은 인터넷 시대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 Cell phone 으로 text 를 주고 받거나, 카톡으로, email 로, 혹은 facebook 이나 twitter 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지라는 단어가 점점 생소해 지고 있습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고어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얀 종이 위에 손으로 쓰는 사랑의 편지야말로 더 진한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을 읽는 사람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로 받아들여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읽고 있습니까?

   본문의 문맥은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바울의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몇 몇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혹은 총회의 추천서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1절) 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혹은 총회에서 신뢰도가 낮은 어떤 영적 지도자를 보낼 때에 천거서, 즉 추천서를 써서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써 준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이 없이 선교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스스로 추천서를 써야 하겠느냐 아니면 어떤 사람처럼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너희에게 부치던가 너희로부터 쓰게 하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2절)고 합니다. 물론 바울과 동역자들의 설교와 삶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합당하기에, 경건하기에 추천서가 따로 필요 없었습니다. 무언가 미심쩍을 때, 신뢰가 별로 없을 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기 위하여 그 사람을 입증할 필요가 있을 때 제 삼자가 추천서를 써주는 것이 아닙니까? 경건한 삶과 전도의 열매가 뒷받침이 되는 바울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한다고 하면,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믿게 된 고린도교인들이 바로 추천서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먼저 보낸 서신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 9:2)고 하였었습니다. 즉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변화를 받은 너희들이 바로, 자신이 정말 사도임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편지지로 사용하던 갈대로 만든 용지, 파피루스(Papyrus)나 돌에 쓴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썼고,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기에 뭇 사람들이 알고 읽고 있다고 합니다. 3절에서 부연 설명하기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동역자들의 복음을 받아들여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면 성령으로 인을 치는 것이기에 도저히 거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파피루스에 먹으로 쓴 것도 아니고 돌비에 쓴 것도 아니라 육체의 심비, 심령에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돌비는 구 언약, 즉 모세의 언약을 새긴 그 돌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성령의 불로 새기셨습니다. 모세의 언약을 돌비에 새기신 것도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돌비에 새긴 언약, 율법의 단점은 그것을 심령에 새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돌에 새겨져 있어서 심령에 새긴 따뜻하고 살아있는 새 언약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또 돌비는 깨어질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 춤추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이 돌비를 던졌을 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심령에 새겨지는 것이기에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또 언제나 어디나 함께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심령이 변화를 받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표시가 납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자그마한 잘못에도 회개가 나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말씀이 생각나게 되어 이겨나갑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어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고 하였으며,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고 하였으며,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라고 예언하신대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고, 그 이후로 모든 믿는 자의 심령에 성령으로 인치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 6절에서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의문(letter)’이라 함은 문자, 즉 모세 언약의 율법을 말합니다. 구 언약과 달리 새 언약은 교인들의 심령에 새겨지는 것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의문’곧 율법은 사람의 죄를 지적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복음은 성령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의문’은 어느 정도 사람이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마치 엄중한 법의 집행은 사람들이 겁을 먹고 죄를 덜 짓게 할 수는 있어도 사람을 바꾸지는 못하듯이 말입니다. 법으로는 감옥을 없앨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버린,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성령의 역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능력은 바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이 변화를 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에 대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 났느니라”(4-5절)고 하였습니다. 결코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진정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선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선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 위에 위치한 동네가 감추어질 수 없고, 등경 위에 빛이 감추어질 수 없고, 짠 맛을 내는 소금은 말하지 않아도 맛을 보면 짜기 때문에 소금인 줄 압니다. 밤 바다에 등대가 있는 이유도, 어두운 방안의 등불도 자기를 주목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빛을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하듯이 이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먹어보면 싱거운지 짠 맛인지 알게 됩니다. 이처럼 심령이 변화된 성도는 반드시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있는 빛을 밝히셔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며, 짠 맛을 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가 그 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때에 굳이 자기 선전을,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세상에 우리를 나타내 보이시고, 그 진정성을 인정 받게 하십니다. 이 확신이 바울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능력으로 고린도교인들이 변한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니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면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신과 동역자들은 단지 그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말입니다(6절).
    그래서 바울은 추천서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변화를 받은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일대일 제자양육 교제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복음의 편지를 한 장씩 쓰고 있지요. 여러분이 행하는 행동과 말들로. 사람들은 여러분이 쓰는 것을 읽지요. 거짓이거나 진실이거나 여러분은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편지를 받고 읽는 사람이 여러분의 편지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될까요? 만약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쓴 편지라면 읽고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으로 쓰여진 편지이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잘 모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화려한 포장보다 그 속에 있는 진실한 내용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겉모습을 포장하고, 꾸미고, 고치고 하여 아름답게 보이려 합니다. 그러나 점점 알아가면서 주위 사람들이 그 속을 들여다 보고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스스로를 추천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하여 추천서를 사용합니다. 그것도 사정을 해서 잘 써달라고 합니다. 진솔하게 쓰다가는 인정은커녕 수치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속 사람을 들여다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아 점점 주님을 닮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 편지를 읽고는 감동을 받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만약 ‘의문’을 지키는 것으로 안주하면서 형식적으로 나 홀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직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그 진정성을 인정 받아야 정말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속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 받은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를 볼 수 있도록 늘 펼치고 읽도록 합니다. 아니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버린,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성령의 역사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일단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 사람들은 여러분의 편지를 읽습니다. 각가지 모양의 편지일 텐데 잘못하면 이상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서 오히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예 그리스도의 편지가 아니라 다른 편지를 읽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 심각한 문제이며,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마치 어떤 편지는 받아 읽고서 너무 기분이 나빠서 찢어버리듯이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심령에 성령께서 인친 사람들로서 변화를 받아 우리를 읽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해주는 감동을 끼치는 편지,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편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편지의 삶, 즉 경건과 겸손과 섬김의 빛을 저절로 발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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