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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8-12 (월) 10:2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20    
부활의 유익(고전 15:29-34)


예수님 이 땅에 살아계실 때 한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마 22:23-32). 남편을 여럿 섬겼던 아내가 죽으면 나중에 부활해서 누구의 남편이 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꾸짖기를 성경도 잘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이 부활하게 되면 시집, 장가 같은 것은 없고, 천사들처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1-32)고 하였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32절에서 현재 시제(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의 조상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죽었으나 현재 그 영혼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그들도 주님 재림하시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의 이론을, 어떤 사상을 말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 삶과 전혀 관계가 없는 비현실적이며(irrelevant), 실제적이지 않은(Impractical) 책이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올바르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비록 부활을 믿었어도 정작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리(doctrine)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삶에서도 바르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올바른 신앙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을 살게 합니다. 올바로 믿는 사람들은 경건한, 도덕적인 삶을 삽니다. 그래서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서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라고 찬송을 부르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사람들이 토론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살라고 준 것입니다. 이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함부로 사는 것입니다. 악하게 삽니다.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한 것 같아도,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야망을 따라, 정욕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죄를 짓고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1-11장까지는 순수한 교리, 올바른 신학을 설명하고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한 후에, 마지막 16장까지는 믿는 교리를 가지고 실제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3장까지는 교리를, 4-6장까지는 그 교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진리를 믿는 것과 실생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불의 관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믿느냐가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만약 우리의 영적,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어쩌면 성경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 위하여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너무 중요한 유익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부활이 있다는 것은 구원이 확신하는 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29절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말씀 가운데 해석이 아주 어려운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딱 한 구절만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럴 때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다른 성경 구절들과 함께 해석해야 하며, 그 문맥에서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아니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는 진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천주교에서 말하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대신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진리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는 구원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성경학자들 사이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두 가지 큰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라서, 그렇게 죽은 자들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여, 바울은 그들의 관습이 성경적이지 않으나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세례를 받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또 다른 해석 하나는 “죽은 자들 위하여”라는 문구에서, “위하여(for)”라는 전치사를 “앞에서(in front of)”라고 해석하여, 부활이 없다고 하면 죽은 자들 앞에서 산 자들이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 앞에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증거하는 예식이니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앞으로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부활이 있기에 구원도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해석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믿고 죽은 자들도 반드시 부활하기에 구원 받고 세례 받는 것도 옳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섬김의 유익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0-31절)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때마다 눈 앞에 있는 위험,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자신의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매일 눈 앞의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다 포기하고 싶어도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고, 자신도 부활할 것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다 내려 놓고 오로지 주님만 붙들며 섬긴다는 뜻입니다. 아니 자신이 날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실제 삶에서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주를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면, 죽으면 주께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믿는 자의 삶은 하루 하루가 죽음과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님을 섬길 때에 우리 자신이 죽으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안의 성령께서 살아 역사하셔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이겨나가도록 하실 줄 믿습니다.
    바울은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32절상)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3차 전도여행 중에 3년간 에베소에 머물 때에 겪었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행 19장). 자신을 핍박했던 자들을 맹수로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었던 것은 실제로 싸우는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부활을 소망하며 인내함으로 이겨서 자신에게 유익을 끼치지 않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확신하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셋째는, 성화의 유익입니다. 바울은 우선 이사야서 22:13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32절 하반절에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죽으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뭐 그렇게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냥 실컷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놀고 즐기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3-34절)고 하였습니다. 즉 죽음 후에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어도, 부활의 소망이 있는 믿는 자들은 그런 사탄, 마귀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사탄, 마귀는 많은 사람들에게 속삭입니다. 무슨 부활이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네 욕심대로 살고, 마음껏 즐기다가 죽어야지 안 그러면 후회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 때 부활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들은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곧 주님 만날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 아무리 힘들어도 믿는 자답게 거룩하게 살아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33절의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문구는 당시 유명한 헬라 시인 Menander 의 세속적인 희극(comedy)의 대사를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도 나쁜 친구들과 사귀면 악한 영향을 받아 그들도 같이 행실이 나빠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인들 가운데서도 자꾸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선한 행실을 하지 못하고 추하고 더러운 행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부활의 신앙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부끄러운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진리를 확실히 믿는다면, 현재 선한 행실로 거룩한,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이 완전히 타락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깨어서, 정신을 차려서 의를 행하라고 합니다(34절). 아직 살아있다면 그럴 기회가 주어졌으니 결단을 하고 악한 동무들과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좋은 동무들을 사귀며 함께 선한 행실로 하늘에 상급을 쌓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고 하였듯이,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으니, 불의를, 악한 것들을 심지 말고 의를, 선한 것들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고, 매일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매일 묵상하고 산다면 그런 성화의 유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죽고 나면 분명히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부활의 소망을 매순간 붙드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소망이며, 부활의 능력입니까? 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르게 삽니까? 부활의 소망이 주는 유익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입니까? 그러나 이미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는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을 믿기에, 곧 주님을 다시 만나는 것을 믿기에 바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유익입니까?
   그리고 죽은 후에 부활을 믿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함부로, 내 마음대로 정욕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경건하게 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 또한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까?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온갖 악을 행하며 삽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아니 매순간 주님 다시 만날 부활을 생각하며 사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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