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724,430
오늘방문 : 34973
어제방문 : 44290
전체글등록 : 3,882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8-25 (월) 10:4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72    
참된 목회자의 관심(1) (고후 12:11-18)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순수하게 친절한 사랑으로 대하였는데 그것이 의심으로, 시기 질투로, 중상모략으로, 빈정거림으로, 심지어 미움으로 돌아오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계속 당하다 보니 내가 원하지 않지만 나도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불신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하면 그렇겠지 하고 넘어가겠는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럴 경우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정말 순수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바울에 대하여, 아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수한 믿음으로 반응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다툼과 시기와 중상모략과 조롱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용서하라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셋째 하늘,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도 하였습니다(1-4절). 하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5-10절). 오늘 본문 서두에서도,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11절)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바울의 순수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재물도 요구하지 않고 사역을 하니 자격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12 사도와 같은 큰 사도들에 비하여 자신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만 주신 고유한 표(mark), 곧 증거들을 말합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12절)!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후 초대 교회들이 탄생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친히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기적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도록 허락하신 것이기에 표적(signs), 기사(wonders), 능력(miracles)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이 기도하면 귀신들린 자가 놓임을 얻게 되고, 병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뭄에 비를 오게 하는 등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기적들보다도, 사도라고 한다면 “모든 참음”이야말로 참 사도임을 증거하는 표라는 것입니다. 모든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10절). 이유는 고린도교인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서기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기 원했습니다.
사람이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좀 친절하다가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고 나면 냉랭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사랑으로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였고, 겸손히 대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도의 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친절한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채워지거나, 그 기대가 채워질 가능성이 보여지지 않으면 더 이상 친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례하게 대합니다. 미워합니다.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의 태도 여하에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친절하고 겸손하다면, 오래 참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세상에 대하여 교만합니다. 하지만 참 사도는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목회자는 세상에 대하여 겸손히 오래 참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잘 참습니다. 여러분도 오래 참으셔야 합니다. 환난을 당해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절하)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참된 목회자의 자신에 대한 관심(concern)은 희생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지만, 바울은 온전히 희생하는 삶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13절)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를 개척했지만, 다른 교회보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부족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것이라고, 사역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공평하지 못한 것이라면 용서하라고 수사학적으로, 풍자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이라고 돈을 받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자신이 희생할지언정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만큼은 받지 말게 하신 것입니다. 유난히 그들이 돈에 약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교회들에게서는 사례를 받으면서 고린도교회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예외적이며 어떻게 생각하면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니 근본적인 이유는 바울이 그들에게 구했던 것은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14절)고 하였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시간과 건강과 재물이 중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동기가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거의 어린 아이 수준임을 알았기에, 정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마치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온전히 희생하듯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저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몸이 망가지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유는 더욱 사랑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15절)라고 합니다. 때가 되면 그렇게 사랑을 쏟아 부은 바울을 사랑하게 되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자식이 철들어 부모의 사랑을 깨닫듯이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참된 목회자의 사역의 관심(concern)은 정직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의 야망(ambition),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사역하기 때문에 양들을 속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은, 섬김은 정직했습니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16-18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마치 부모처럼 그들에게 희생적으로 사역을 했는데, 어떤 이들이 모함하는 것이었습니다. 디도를 보내서 헌금을 요구한 것이 자신을 위한 궤계(scheme),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도 여느 교회들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우니 그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라고 디도를 보냈지만, 바울이 공교한 자, 속이는 자가 되어 자기 욕심을 챙기기 위하여 보낸 것이라고 모함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그런 중상모략을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의 마음에 상처가 많고 의심이 많았든지, 그들은 돈 이야기만 나오면 무너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디도와 함께 한 형제도 보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믿을만한 사역자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재물을 취할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동역자들 안에 내주하는 동일한 성령님이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동일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후 11:31)고 말했듯이, 자신은 추호도 속이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갈 1:20)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당시 바울에게 디도와 같은 동역자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아무리 자신이 정직하다고 주장해도 누군가 옆에서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난감할텐데, 디도가 있어서 오해를 풀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목회자와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을 보여야 할 영적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어떤 사역이나 섬김에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 일을 할 때에도 속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돈 문제에 있어서 정직하십시오. 자유 하십시오. 인색하지 마십시오. 돈 문제에 있어서 정직한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정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참된 목회자의 관심에 대하여 다음 주일에 세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만(19-21절), 사도 바울만큼 참된 목회자의 본을 보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그의 본을 따라 목회하기 원합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말입니다. 제가 설교한대로 살지 않는 부분이 보이면 여러분들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목사가 되도록 여러분들이 도와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겸손히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 목회자, 삯꾼 목자는 교만하며, 권위를 내세우며 주장하기 때문에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회자는 겸손히 잘 참아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힘들어도 겸손히 잘 참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는 희생합니다. 거짓 목회자는 자신을 희생하기는커녕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목회를 합니다.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참된 목회자는 온전히 희생합니다. 영적 부모로서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모든 것으로 희생합니다. 심지어 몸이 망가지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들도 작은 목자라면, 영적 지도자라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또한, 사역을 할 때에 정직해야 합니다. 거짓 목회자는 속여서 자기 이익을 취합니다. 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회자는 모든 일에 정직합니다. 특히 돈 문제에 정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모든 일에 정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뿐만 아니라, 세상 일에도 말입니다. 그래야 믿는 자로서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인내(perseverance), 희생(sacrifice), 정직(honesty)! 사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사역(섬김)에 대하여 그 모든 관심의 동기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지, 무슨 동기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섬김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어도 정말 순수하게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하는지, 부활의 소망으로 주님 다시 만날 때를 생각하며 하는지 말입니다. 그렇게 일을 감당할 때에 어떤 환난을 당해도 끝까지 인내하며, 겸비하게, 친절하게, 정직하게 섬길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전도사는 전도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안수집사는 안수집사로서, 권사는 권사로서, 서리집사는 서리집사로서, 평신도로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바라보실 때 올바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입으로만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주님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고쳐야 할 부분들이 있으면 이 시간 고침을 받기 원합니다. 정결하게 되기 원합니다. 첫 사랑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42 주일설교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히9:11-22) 관리자 2015-10-02 1512
541 수요설교 승리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수 8:15-23) 한태일 목사 2014-09-05 1512
540 주일설교 사랑이 여기 있으니(요일 4.9-10) 한태일 목사 2017-09-11 1510
539 주일설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롬 1:17) 한태일 목사 2017-10-30 1508
538 주일설교 더 좋은 새 언약(히 8:1-13) 한태일 목사 2017-11-13 1500
537 주일설교 영적 체험을 자랑하십시오(고후12:1-10) 한태일 목사 2014-08-18 1498
536 수요설교 666(계 13:11-18) 한태일 목사 2017-05-18 1486
535 주일설교 점점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갑시다(히 5:11-14) 한태일 목사 2017-08-14 1479
534 주일설교 부활신앙의 능력(눅 24:1-12) 한태일 목사 2017-04-17 1473
533 주일설교 참된 목회자의 관심(1) (고후 12:11-18) 한태일 목사 2014-08-25 1472
532 주일설교 그리스도와 교회: 이 비밀이 크도다 관리자 2015-08-25 1471
531 주일설교 준비하십니까?(고후 9:1-5) 한태일 목사 2014-06-23 1461
530 수요설교 아마겟돈 전쟁(계 16:12-21) 한태일 목사 2017-08-10 1458
529 주일설교 우리에게 있는 위대한 대제사장(히 4:14-16) 한태일 목사 2017-07-31 1457
528 주일설교 피흘림이 없으면(히 9:15-22) 한태일 목사 2017-12-04 1455
527 주일설교 회막을 향하여 진을 치고 (민 2:1-2) 관리자 2024-03-04 1454
1,,,5152535455565758596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