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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01-06 (금) 00:44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295    
사랑 가운데 행하라 (엡 5:1-2)
지난 주일 올해 우리 교회 표어 “다음 세대와 함께 자라가라” 라는 말씀을 나누면서,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우리의 2세, 3세들과 함께 자라가자고 하였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변화가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open mind 로 개혁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 사랑의 말과 행동이 자라가야 하겠기에, 변화가 있어야 하겠기에 말씀을 나눕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을 본받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 4:8), 그 사랑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닮아라’고 합니다. 즉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보고,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데, 그 모든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닮기 위함 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아무리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알고,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모습이 안 보이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앙 됨됨이(인격)이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분을 닮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친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생아 아닐까요? 참 믿음이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쩌면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늘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다스리는 분, 두려운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그 능력과 권세의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께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잊어서는 안될 것이 우리 하나님은 또한 자비와 긍휼,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앞선 7절,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에게 알리셨도다”는 말씀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구약 출애굽기 34장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기적과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 앞에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 앞에 진노를 샀습니다. 모세도 분노하여 십계명 돌판을 깨뜨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시면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고 너를 중심하여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면서 그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하자,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하시기로 합니다. 그런데 같이 가지는 않겠다고,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모세가 ‘하나님께서 같이 가시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기도하자 그것도 허락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주시는 장면이 출애굽기 34장 1절 이하 내용입니다. 처음에 주셨던 십계명 돌판은 깨어져 버렸으니, 다시 모세에게 돌판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판에 새로 십계명 말씀을 새기겠다고 하시니,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시 돌판을 만들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5-6)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어 마땅한 백성들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특히 그 사랑의 속성 가운데 긍휼히 여기며 아량을 베푸시느 관대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천천히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그러한 긍휼, 아량, 관대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인간의 ‘죄’를 갖고 생각할 때, ‘우리가 해서는 안될 짓을 했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구나’라는 차원에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절대주권자로서의 권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때 이 생명과 진리와 복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오는 두려움, 외로움인 것입니다. ‘벌’인 것입니다. 사랑도 없고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 죄인인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관계가 회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심은 하나님이 바로 긍휼, 아량, 관대함의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차적으로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관용과 용서, 아량을 베푸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저들의 아비, 사탄처럼 거짓말하고 남을 해치는 것이 저들의 재미인 것이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맞다, 틀리다’ 라는 쪽으로만 판단하면서, 분명히 옳은데도 불구하고 사납게 거칠어지고 서로 해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주위에 사랑이 없다고 예기를 듣는 것도 이 ‘맞다, 틀리다’는 심판의 개념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고, 본인들의 신앙도 그 기초 위에 서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자기의 옳음을 자꾸 주장하며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필요한데, 문제는 동기입니다. 태도입니다. 사랑으로 하느냐는 말입니다. 사랑은 없고 교만이 들어가서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전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사탄 마귀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하였습니다. 해석이 필요 없는 구절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마음이냐, 사탄의 마음이냐는 것인데,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닮는 게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 잘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긍휼과 자비, 용서함, 관대함, 아량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하셨습니까?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가 풍부한 하나님이로다. 우리의 죄과를 따라 갚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행한 대로 하지 않는 하나님, 우리의 처지를 아시며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것을 닮지 않으면 십자가가 헛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이 진리를 못박아 두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말과 행동에 습관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데 있어서 그 희생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속성 가운데 그 핵심인 희생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먼저 채우고 남은 것으로 남에게 베풀며, 고결한 척 자기 이름을 내세웁니다. 세상의 사랑은 결국 자기 만족이고, 전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섬기려 왔다,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는 말씀이야 말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본받아야 할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내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감합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웃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지만, 우리는 이웃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가 잘 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시면서 자신을 내세우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내가 널 도와주었다. 내가 널 사랑했다. 네가 받은 모든 것, 얻은 모든 것은 내가 해준 것이다’ 식의 확인이 없습니다. 공치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셨다 함은 가진 것이 없이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가 처해 있는 낮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늘 영광의 보좌에 계셔야 하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흙탕물에 떠내려가는 죄인을 구원하려 그 흙탕물 속에 오신 것입니다. 천군 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시고 오셔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구원 받아라, 병이 나아라, 복 받아라, 평안하라’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께 ‘내가 누구를 도우려고 해도 가진 게 없어서 도울 수가 없어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테니까 돈을 더 많이 주시고, 건강 주시고, 능력을 주세요’ 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능력이나 재주,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 있고, 못 가지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세입니다. 희생하려는 자세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다 이기적입니다. 세상이 사랑을 예기할 때에는 다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할 수 있을 때입니다. 자기 만족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 사랑이 무슨 명분도 아니고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공치사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희생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본질(nature)입니다.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의 배경은 고린도교회 안의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고 하였습니다. 희생하는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라는 말입니다. ‘네가 능력이 있느냐? 네가 열심이 있느냐? 사랑이 없으면 그 능력과 열심과 그 어떤 종교적인 봉사도 다 헛것이다. 실체가 없는, 아무 유익이 없는 그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남을 향하여 투기와 시기와 자존심이 섞이지 않고 ‘저 사람이 잘 되기 위하여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면서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살이에서 이런 고민과 조바심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자리에서 맡은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로 인하여 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하나님을 만나며 더욱 그 사랑에 깊어 가도록 하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죽어지는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에게 조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며, 자신이 다 쓰고 남은 것을 나누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거기엔 희생이 없습니다. 사랑의 손길이 접촉되는 지점까지 찾아가는 그 간절함, 온유함, 그 지극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서서 빛을 발하고 모든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주는 떡을 받아먹는 위치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희생으로 시작해서, 희생으로 진행되고, 희생으로만 결실되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려서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희생제물)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믿음이 큰 믿음인가요? ‘주님, 올해는 좀 자라가는 한해가 되게 하소서’ 라고 간구하는 우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더욱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 됨됨이를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내 안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너무나도 흔한 주제입니다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아량, 관용, 용서함이,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까? 비슷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긍휼히 여기며 아량을 베푸는 것입니다. 관용,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쉽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량을 베푸시고 관용을 베푸시는데 감히 우리가 안 그런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알게 된 형제, 자매들, 우리들이 기도해 주어야 하는 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여러분이 늘 마음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라면 우리들은 마땅히 엎드려 그 친구가 내 등을 디디고 올라가게 해주며, 그 친구가 편안할 수 있게 내가 엎드린 등에 앉아서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야 합니다(고전 13:7). 이런 사랑 가운데 행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이 참고 기다리며 용서하고, 지고 죽어야 하며,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며 모욕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더해갈수록, 주님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갈수록 사랑이 더해가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며, 관대하게 아량을 베풀며, 용서하는 사랑이 더해가야 합니다. 또한 희생하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모든 일이 이 사랑이 더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하며 하나님을 잘 알고 그 사랑을 배우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렇게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올 한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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