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25,629
오늘방문 : 9028
어제방문 :
전체글등록 : 3,866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12-02 (금) 04:00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591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이 세상에 온전한,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온전하라, 완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 믿는 자들도 거룩하라고 명하십니다(레 11:44, 벧전 16).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완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완전함, 온전함을 추구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성숙해지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을 때에는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면 온전함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온전하도록,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온전하게 되는 첩경이 사랑하는 것인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본문 43절 상반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라고 합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전통은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18절,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의 일부만을 말합니다. 이 명령은 신약성경(마 19:19; 22:39; 막 12:31; 눅 10:27; 롬 13:9; 갈 5:14; 약 2:8)에서 계속 반복되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사랑하며 돌보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세우셨습니다. 더 나아가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릴 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4-5)고 그 은혜를 베푸는 것을 원수에게까지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웃”의 의미는 ‘매일의 삶에서 어떤 필요가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욥의 고백,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욥 31:29) 하는 것처럼, 그리고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잠 25:21)고 하는 솔로몬의 말씀처럼, 분명히 구약의 가르침도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유대 전통은 어떻게 다릅니까? 다시 본문 43절을 봅시다. 주님께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탄이 슬쩍 바꾸는 것을 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사용하면서도 진리의 말씀을 마음대로 빠트리기도 하며, 더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씀을 뺀 것입니다. 사실 레위기 서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은 분명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너무나 잘 아는 구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가르치고, 실천했던 저들이었습니다. 왜 “네 몸과 같이” 를 빠트렸을까요? 저들은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다른 사람에게 추앙받기를 원했고, 칭송받으며, 사랑받기를 원했으며(마 6:2,4,16), 그럴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역사 속에 나타난 대부분의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이 세상의 불신자들이나 몇 몇 신자들은 그들처럼 자신만을 사랑하며, 사랑받기를 원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 건강, 쾌락, 유익과 수입 등 자기 자신에게만 주된 관심을 갖고 살지요.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네 몸과 같이” 를 빠뜨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이웃”의 개념도 자신들이 인정하는 동족이나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세리나 보통 사람들이 여기는 죄인은 이웃에 속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계명은 인간으로서 아주 자연스러운 그런 모습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모습, 원수도 사랑함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합니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 는 것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없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빼는 것보다 더 큰 잘못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원수는 주로 이방인들은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원수로 삼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열조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이나 미디안, 모압, 암몬 등 다른 이방민족을 몰아내고 쳐서 멸망시키라고 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수 3:10). 그런데 사실 당시 팔레스틴의 민족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도덕하고, 잔인하고, 인신제물을 드리는 많은 우상들을 섬기던 족속이었습니다. 즉 사탄의 조종을 받던 하나님의 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대상들이었기에 거룩한 전쟁을 치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구약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실생활에서의 원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탄과 전쟁하여 물리치는 것과 개인적인 원수를 미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우상을 믿고 섬기는 사람에게 대한 우리 개개인의 태도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또한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께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주님의 날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균형 있게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주의 이름으로 나누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44절 상반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가장 powerful 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명하는 사랑은 너무 커서 원수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교만하였고, 비판을 잘하며, 편견에 가득차 있었고, 미움과 복수로 얼룩진 것이었으니, 그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은 너무 어리석고 고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저들은 원수를 미워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미워할 의무도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egwv)”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문법적으로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강조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진리의 참 기준임을 강조합니다. ‘너희 위대한 랍비들, 서기관들, 학자들은 오직 너희 자신이 선호하는 것만 사랑하며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말하건대 저들은 거짓 선생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곧 나의 진리인데 너희는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 개념의 이웃은 개인적인 원수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이웃인지 주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아가페 사랑은 감정보다 의지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아름답고 능력 있는 말씀에서 사랑은 모두 15가지의 특징으로 표현되는데 모두가 다 동사형입니다. 즉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태도, 자세, 의지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요일 4:7-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였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다투는, 서로 시기와 질투하는, 어떤 때는 심지어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예수님과도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둘째로,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악했던 핍박은 종교적인 핍박이었습니다. 하나님 신앙에 대한 탄압입니다. 이유는 이 세상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며, 세상 악과 타락한 종교에 대한 심판을 성도들이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진리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핍박이기에 주님께서는 자신이 핍박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5:20). 그러므로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오늘 말씀은 저 공산권이나 무슬렘권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봅니다. 정도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핍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함이나 불공평이나 경건치 못함, 미움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멀어진 죄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심령들로 여기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가 아가페 사랑을 함으로 그 자녀 됨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게 되는 데, 성도가 소유하게 되는 성품 가운데 그 사랑이 포함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이 그들의 믿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믿지는 않아도 신앙의 기준은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요구하는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예를 해와 비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common grace)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허락하시는 은혜가 아닙니다.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은 인간 모두에게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도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그 사랑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넷째는, 세상 보통 사람들 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6-47절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면 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의 위선과 이기적인 사랑을 꾸짖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자신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세리나 이방인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사랑을 가지고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욕을 듣는 것이지요. 우리는 더 사랑하고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고 소금이지요.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산상수훈의 결론, 아니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위대한 목적이, 복음의 궁극적 목적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을 닮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여기 “온전하라(tevleiov")”의 뜻은 죄가 없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달성하라, 성숙하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온전해질 때까지 성숙하여지라는 뜻이지요. 물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온전함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안되지요.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에 말씀하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요구하실 때에 무작정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허락하십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성도 여러분!
 원수도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위하여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온전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면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그렇게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41 주일설교 영적 전쟁(6) -필요한 기도의 능력- 한태일 목사 2012-02-13 1674
440 주일설교 영적 전쟁(5)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한태일 목사 2012-02-06 1954
439 수요설교 지붕을 뚫는 믿음(막 2:1-12) 한태일 목사 2012-02-03 1903
438 주일설교 영적 전쟁(4) -평안의 복음의 군화와 믿음의 방패- 한태일 목사 2012-01-30 1664
437 주일설교 영적 전쟁(3)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 한태일 목사 2012-01-23 2092
436 수요설교 부흥하려면(창 26:12-18) 한태일 목사 2012-01-20 1584
435 주일설교 영적 전쟁(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한태일 목사 2012-01-16 1656
434 주일설교 영적 전쟁(1)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한태일 목사 2012-01-09 1735
433 수요설교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마 24:45-51) 한태일 목사 2012-01-06 1628
432 주일설교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합 3:1-3) 한태일 목사 2012-01-02 1727
431 특별설교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창 32:22-32) 한태일 목사 2012-01-02 1637
430 주일설교 놓쳐버린 성탄의 기쁨(눅 2:1-7) 한태일 목사 2011-12-26 1731
429 수요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한태일 목사 2011-12-23 1763
428 주일설교 메시아의 탄생(미 5:2-6) 한태일 목사 2011-12-19 1695
427 수요설교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신 15:1-11) 한태일 목사 2011-12-15 1946
426 주일설교 주님의 기도(3) - 믿는 자들을 위하여 - 한태일 목사 2011-12-12 1899
1,,,5152535455565758596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