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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6-06 (월) 03:4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575    
부활과 생명(2) - 말씀을 네가 믿느냐- (요 11:17-37)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주제는 결코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산다고 하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모든 인간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 나사로가 죽을 병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드디어 베다니에 도착하셨는데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17절). 유대인의 장례는 우리와 달리 팔레스틴 날씨가 덥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바로 장례를 하고, 거의 일주일에서 십일 동안 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좀더 진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곡하는 여인들을 불러서 집에서 곡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을 하러 와 있었습니다(19절). 그 와중에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듣고 나가서 맞게 됩니다(20절). 그 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때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볼 때에는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이제 오셔서 그들에게 해 주실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보였습니다. 그 때 마르다는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지 않았습니다. 왜 나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실망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조문객 때문인지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원망을 했습니다(21절).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 나사로가 절대 죽지 않았을 것인데 계시지 않았기에 결국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22절)라고 말을 했습니다.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자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7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마르다는 결코 주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오라비를 살리신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마르다가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를 부탁한 것으로 말합니다. 천주교의 연옥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이 죄를 다 갚지 못하고 죽으면 연옥에서 공로가 다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기도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미 죽은 사람의 죄를 이 세상 사람들이 기도해 주어서 용서를 받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마르다는 이미 오라비의 죽음은 인정하고 이 슬픔 후에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무슨 위로나, 더 큰 은혜가 있을 것을 기대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주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이 말씀은 이미 죽어 썩어져 가는 나사로를 살리실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원어에는 ‘다시’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리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말입니다. 왜 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름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이 과거에도 있었고, 분명히 마르다도 알고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기도 하였고(마 9:18-26),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린 적도 있습니다(눅 7:11-17). 그러므로 마르다는 주님께서 오라비를 살리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던지 나름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지 마시고, 액면 그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르다가 믿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사로 한 사람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는 인간에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하시고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도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부활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유일무이하게 죽었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그리고 죽은 후의 삶이 또 있습니다. 그 삶이 이 세상 육신의 짧은 삶과 비교가 되지 않는 영원한 것이기에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믿느냐고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26절하).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의 삶을 온통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살든 못살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수고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죽음 너머까지 영원히 우리의 삶을 연장시켜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래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실 상급과 함께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의 마르다를 보면서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런 엄청난 능력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라고 신앙고백만 할 뿐입니다. 즉 입술로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진리를 실제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그리스도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당연히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으로 믿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알고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는 그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습니까? 사실은 불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도 자기 동생에게 가서 이런 엄청난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다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28절하)고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단지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선포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마르다에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관계된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것이 생명과 관계가 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주님을 만났는데,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산다고 말씀하셨다. 주님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셨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동생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마르다와 달리 어떤 중요한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입을 열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마르다로부터 엄청난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마르다와 똑같이 원망하는 것을 봅니다(32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며, 문상객과 함께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고(33절), 아마도 마르다가 중요한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화를 내지도 않으시고, 야단치지도 않으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다만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35절). 33절에 ‘통분히 여긴다’는 말은 분노가 가득찬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이 세상에 끌어드린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발하고 계신 것입니다(38절 참고). 그리고 ‘민망히 여긴다’는 말은 죽음을 만난 인간의 슬픔을, 그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큰 고통과 슬픔을 당한 그들과 마음이 같아지셔서 깊이 이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우셨다고 했는데, 원어에 의하면 무슨 통곡의 울음이 아니라 조용히, 잔잔하지만 진한 슬픔의 눈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슬퍼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 원인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분노는 그것을 바로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때로는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고 야단을 치거나 책망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며 우십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한 처지를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하십니다. 우리에 대하여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 사탄 마귀들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비록 우시는 주님에 대하여 주위에서 비꼬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입니다(36-37절). 그 사람들의 말은 개의치 않으시고 슬퍼하며 비통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우시면서 우리의 부족한 것을 우리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셨습니다. 성경은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정복하고 그 사망의 쇠사슬에 묶여서 종 노릇 하는 우리들을 놓아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좋은 일이나 슬픈 일에 대하여 일체 감정 표현이 없는 분이시라면 우리가 가까이 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정말 주님의 말씀을 믿고 계십니까? 마치 마르다에게 처럼 엄청난 말씀을 하시고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입으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믿고 있는 모습이, 행동이 나타납니까?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날 정도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 살아날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 주님에게 여러분 삶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사십니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다면 모든 삶을 다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현재 내 스스로 풀 수 없는 어떤 문제로 인하여 낙심하여 절망하고 있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하게 여기는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그 영광은 더 찬란히 빛을 발할 기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 아파할 때에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하여서는 민망히 여기시고, 마귀들에게는 분노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죽음의 세력조차 이기신 것처럼, 그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며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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