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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7-23 (토) 20:5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06    
주님을 섬기려면(요12:17-2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주님을 섬기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면 거의 다 ‘네, 주님을 섬깁니다. 섬기기 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을 따라가며, 주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면 부담스러워 하며 주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분들이 주님을 부인하거나 멀리하고 사는 분들은 아닙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예배도 성실하게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매라고 하는 멍에를 매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면 별로 앞장서지 않고 뒤로 물러서 주춤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서는 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종려주일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라고 외쳤던 수많은 무리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왕’ 즉 메시아에 대한 의미를 오해하거나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절대주권자로 바로 알고 믿는다면 결코 왕의 신하로서, 혹은 주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주님을 섬기며,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26절상)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였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의 무리들 가운데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니 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17-18절). 한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고, 없이하려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이 무리들의 함성에 놀라며,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쫓는도다”(19절)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 헬라인 몇 사람이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합니다(20-21절). 당시 헬라인들은 세계적으로 가장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헬라 철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헬라인 중에서 유월절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온 것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사람이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우선 빌립을 만나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빌립과 안드레가 주님에게 그 뜻을 전했습니다(22절).
  이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이 죽을 때가 다 된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한번도 자신의 죽음을 비참한 것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아니 순교를 하게 된다면 정말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 영광을 잘못 이해하여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셔서 받으실 세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희생하지 않고 그런 세상적으로 왕의 영광을 얻는다고 한다면 인간은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는 일인데, 지금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속사역이 자기가 영광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한 알의 밀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 너무나도 평범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밀알이 있는데 땅에 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언제나 밀알 하나로 남고, 말라져 버려서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땅에 심으면 때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죽는 것을 씨를 땅에 심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죽지 않고 이 세상나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높아져서 유명해지는 것은 밀알이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 결국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25절에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뜻이 문자적으로 정말 우리 생명을 미워하고 학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생명’이라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목숨, 자아’ 인데, 자신의 뜻, 의지, 소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미워한다는 의미는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뜻은 자기 뜻, 자아를 부인하라, 자신을 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막 8:34)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자신의 뜻, 소원은 부인하고, 자신을 덜 사랑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며 따라가야 할 우리도 예수님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자아를 부인하고 희생하여 썩어져 없어지는 한 알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여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 세상의 좋은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너무 좋아하고, 또 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조금 유명해지고 성공하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주님처럼 자기 자신을, 자아를 부인하고 살지 않으면 25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 15:31). 로마서 12장 1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한 것처럼, 비록 목숨은 붙어있어 산 제사이지만, 제물은 죽여서 드리는 것처럼 자신이 죽어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까? 자아가 죽는 사람입니다. 나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 나의 욕심, 나의 고집, 그 무엇이든지 주님의 말씀에, 그 뜻에 거역되는 것은 다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렇게 살라고 깨우치실 때에 나 자신을 포기하고 성령께 맡기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26절을 다시 보시면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뿐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섬긴다는 헬라어 원어에서 나온 말이 ‘집사’입니다. 즉 집사는 주인을 섬기는 종, 하인, 머슴을 가리킵니다. 즉 주님을 섬기려면 정말 종처럼, 하인처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섬겼습니다. 참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낮아질 대로 낮아져 모든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 2:6-7). 이 땅에 계실 동안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죽도록 충성하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때때로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셨습니다(눅 22:27). 요즘은 종, 하인이 없어서 여러분 머릿속에 종에 대한 개념이 언뜻 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하여 옛날 사극을 보신 분들은 노예, 머슴을 생각하면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남북전쟁까지만 해도 노예, 머슴들이 있었기에 그 때 당시를 그린 드라마나 영화를 생각하면 됩니다.
  한참 바쁜 때에는 주인들도 일하겠지만 그래도 주인들은 바깥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쉴 수 있고 밥상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 머슴들은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하고 들어와도 쉴 수가 없습니다. 저녁도 준비해야 하고, 잔 심부름을 다 해야 합니다. 저녁이 다 끝나도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일마저 다 끝내야 드디어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그에게 수고했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종으로서, 머슴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종, 머슴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라”(눅 17:10)고 하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무슨 칭찬이나 상을 바라지 않는 법입니다. 주인이 매정하다고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자세, 태도를 가지고 섬기는 자가 바로 진짜 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런 종의 자세, 태도를 가지고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들입니다. 하인들, 머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어쩌면 주님의 손에 붙들린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막대기입니다. 그저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들을 사용해 주시는 것만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잘난 줄 알고, 똑똑한 줄 알고, 가진 것이 좀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많다고 자랑하며, 종으로서 주님의 손에 붙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참 제자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연약하더라도 주님께 붙들린 종처럼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며 종, 머슴처럼 섬기시면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26절). 하나는 주님 계신 곳에 여러분도 함께 있습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멀리는 저 천국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뜻이며, 가까이는 늘 주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있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진실로 믿는 자들은 다 참 제자의 삶으로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종처럼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축복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여러분들을 귀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26절하).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의 대통령이 귀하게 여기며 영예를 주어도 감격하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며 영예롭게 하신다는 데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절하)고 하셨습니다. 여기 존중히 여긴다는 말이 26절에 귀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섬기고 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신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갈 5:24). 아니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고 사는 사람이, 종이 그 정과 욕심대로 산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는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서였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욕심, 세상의 가치에 대하여 우리가 죽으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 믿는 성도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사람,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입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우리의 심령이 변화를 받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내 속에 위로와 평안과 기쁨이 넘칩니다. 주위 환경이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으며 소망을 가집니다. 이렇게 심령이 소생하면 얼굴조차 변합니다. 역동적인 삶이 됩니다. 생명의 향기를 내뿜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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