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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6-27 (월) 05:3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78    
부활과 생명(4)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으나- (요 11:45-57)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딪히는 여러 상황, 환경 가운데 어떻게 생각하고 결단하여 반응을 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항로가, 미래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선택을, 지혜로운 반응을 잘 하여서 멋진 인생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쁜 선택을, 어리석은 반응을 하여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창 1:27-28). 하지만 인간이 죄의 길로 가는 바람에 죄를 싫어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망선고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이 다 당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사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이미 3 주일에 걸쳐 살펴본대로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자신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증거하는 표시로 놀라운 기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사람을 말씀으로, 그 이름을 부르시며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한 반응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반응은,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45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즉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리심으로 예수님이 모든 죽은 성도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일으킬 구원자이라는 사실을 보았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사실 만약 우리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능력 있는 의사를 만나 고침을 받고 살 수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면 어떤 고통도 참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짓고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주지사나 대통령이 사면해 줄 것이 확실하다면 얼마나 소망이 있겠습니까? 얼마 안 있으면 자유를 얻게 된다는 생각으로 감옥에서도 기쁘고 즐겁게 지낼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자건, 배운 자건 못 배운 자건, 잘 생긴 사람이던 못 생긴 사람이던, 유명한 사람이던 비천한 사람이던, 권력자이던 피지배자이던 다 죽습니다. 다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 사람을 그 이름을 불러 살게 하신 것은 우리 예수님이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 죽음을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으면 죽은 후에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죽어서 며칠이 되었던 몇 십년, 몇 백년이 되었던 상관없이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도 소망을 주셨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6절)고 약속하셨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결국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장소만 조금 바뀌는 것뿐입니다. 잠시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뿐입니다. 주님 재림하시면 다시 합하여져 죄를 모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반응은,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46-54절). 비록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그 중에는 놀라운 사건을 보고도 믿지를 못할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가서 고하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표적을 이전에도 보여준 여러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능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시기, 질투하며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입니다.
47-48절에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였습니다.  사실 제사장들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잘 어울리지 않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서로 공통점이 별로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적인 규례에 철저했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후의 부활을 믿었고, 천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족주의자들로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세력이었는가 하면, 사두개인들은 로마 제국 위정자들과 타협을 하며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유대 사회의 보통사람들,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사두개인들은 부자요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데에는 하나가 되어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믿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살기 등등한 사람들 말입니다.

공회에서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나서서 한 마디 합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49절하-50절)라고 말입니다. 즉 그냥 예수님을 죽여서 더 이상 말썽이 없게 하면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로마 제국에게 유대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시는 과정에서 가야바 앞에까지 가서 심문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훗날 하나님 오른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더니, 가야바가 자기 옷을 찢으며 참람한 말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마 26:64-66). 아이러니칼한 것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님을 죽임으로 유대 나라가 그대로 존속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주후 70년에 망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오묘한 것은 가야바는 세상적인, 육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말이 진리를 예언한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51-52절에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즉 가야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얄팍한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인,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진리가 그의 말 가운데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주후 90년 이후이므로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을 당한 훨씬 후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온 세상 나라 사람들을 불러 모아 10장에서 말한 것처럼 각각 자기의 양들을 불러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가야바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본 세 번째 반응의 부류는,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55-57절).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올라오지 아니하겠느냐”(55-56절)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유월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면 다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놀라운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관심이 있을 뿐, 이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덤덤한 반응일 뿐입니다. 구경꾼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이 종려주일에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가, 나흘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입니다(요 19:15). 예수님에 대하여 피성적인 관심을 가졌을 뿐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적대감을 가졌던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과 하나로 뭉쳐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면 전혀 무반응, 무관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 영혼이 불쌍한 사람들 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 두 번째나 세 번째의 반응을 보이셨던 분들이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이라면 반드시 심령에 찔림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깨우침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빠를수록 좋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한편 강도처럼 너무 늦게 결단하여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첫 번째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로 믿으시는 분들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진실로 감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죄 사함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엄청난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십자가에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희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사망을 이기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의 반응은 적대감으로, 살기 등등할 지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이 올바르고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만 충실해서도 안됩니다. 가정에서도, 세상에서도 믿는 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모습과 교회에서 열심을 내는 모습이 다르면 안됩니다.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거나 믿는 자답게 진실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빛이 나야 합니다. 소금의 짠 맛이 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우리는 새성전에서 예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성전을 주셨는데, 우리들만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하나님께 죄송합니까?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전도, 혹은 인도하셔서 큰 예배당에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고난 중에 있습니까? 사실 죽을 병에 걸렸다가 죽어버린 나사로의 가족처럼 큰 고난을 통과하십니까?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도가 받는 고난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쓰시면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의 영원한 표어인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 속에 우리가 받는 어떤 고난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원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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