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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3-21 (월) 22:1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44    
치료의 빛, 예수 그리스도(요 9:1-12)
사람들은 오랫동안 육신이 병드는 것만 알았지, 영혼이 병드는 것은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정신병, 마음이 병드는 정도로 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육신이 병드는 것보다, 아니 마음이 병드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이미 영혼이 병들어 있거나, 병드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하자, 아직은 때가 아니기에 그 자리를 피하여 나오셨습니다. 그 때 길 가에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한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육신의 병으로 고통 당하는 인생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영혼의 병까지 치료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심으로 자신이 이 세상의 빛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하여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인생이 병들었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시는 분은 이 시간 치료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치료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 오시기 400여 년 전에 말라기 선지자가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고 예언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제자들은 이 시각장애인이 날 때부터 보지 못하게 된 것이 그 사람의 죄 때문이거나 부모의 죄 때문으로 알고 예수님께 묻습니다(2절).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양의 고통 당하는 것을 죄 값을 치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 시각장애인이나 그 부모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눈이 멀게 된 것이 부모나 그 자신의 범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이나 고통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범죄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설명이지, 구체적인 적용에 해당하는 설명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본질적인 해석을 모든 사람의 고통과 불행에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11장에서도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리시기 전에 그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왔을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엉망이 되고 실패한 인생이 되었을 때 누군에겐가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가장 많은 경우가 부모 탓을 하든지 아니면 환경 탓을 합니다. 아니면 자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이나 게으름이라도 탓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과거의 짐을 그대로 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과응보의 사상과 운명론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교나 유교 사상과 비슷합니다. 하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통념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즉 지금 고난 당하는 것은 과거의 지은 죄, 악 혹은 업보 때문이며, 만약 지금 잘 된다고 하면 과거의 의, 선, 혹은 공덕 때문이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율법주의는 모든 원인을 과거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과거지향적 사고는 반드시 운명론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든 고난의 근거가 내 죄다’라는 말을 바꿔서 하면 ‘모든 형통의 근거는 내 의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비성경적인 생각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시각장애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잠시 허락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사람의 고난은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고통의 원인이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소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을 과거지향적인 생각에서 미래지향적인 생각으로 바꾸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순종하는 사람은 과거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대하는 태도가 다르고, 앞의 일을 대하는 방법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도 징계 자체를 과거의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위한 훈련으로 받는다고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습니다. 욥이 강조하는 것은 단련이 아니라 정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모레가 내일보다 훨씬 낫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도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실제로 과거의 어떤 아픔도 예수님께서 다 치료하셔서 다시 회복시키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병이든지 치료하셔서 멋진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으로 놀라운 3절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밤과 낮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4절)!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맞는 때부터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못하는 진리의 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 이 땅에 살아계시는 동안은, 또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는 세상의 빛으로 역사하셔서 진리의 낮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고 지금 우리의 귀에 그 말씀이 들리고 있는 때는 진리의 낮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얼마든지 망쳐진 인생을 치료 받고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진리의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들을 수 없는 때를 말합니다. 또 사탄의 세력이 진리를 억압해서 진리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진리를 몰라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서 실패한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임하고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때가 바로 낮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를 귀하게 여기고 우리는 우리 인생을 고침 받아야 하고 새로운 인생으로 새 출발하여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을 나를 기쁘게 하는 좋은 설교 듣는 시간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 인생을 치료 받는 시간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내 내면에 있는 모든 상처와 병들고 망가진 것들을 다 꺼내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어떻게 치료를 받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말 한마디로 기적적으로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지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그 사람의 눈에 바르셨습니다(6절). 그 사람이 이 치료 행위를 더럽다고 생각하고 거부했더라면 그는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별로 기분 좋지 않은 행위였고, 주위에 보는 사람들도 흉측하게 보면서 조롱했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의 침에, 혹은 진흙에 무슨 치료제가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바른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자기의 병든 부분을 진흙을 발라서 그 부분을 노출시키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입이 더러워서 늘 욕하고 사는 사람은 입에 진흙을 바르고, 손이 악한 자는 손에 진흙을 바르고, 양심이 더러워진 자는 양심에 진흙을 바르라는 말입니다. 체면이나 위신, 자존심 때문에 진흙을 거부한다면 치료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내 과거의 모든 죄를, 부끄러운 병든 부분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은 사람은 그대로 살다가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후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7절).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이 원래 물이 없던 예루살렘에 지하 바위를 뚫어 터널을 만들어 기혼 샘에서부터 물이 흘러 고이게 했던 곳입니다. ‘실로암’은 그 뜻이 ‘보냄을 받았다’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렇게 병든 인생을 어디론가 보내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인 실로암, 하나님의 성령이 흘러 넘치는 곳이 어딥니까?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성령이 넘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아픈 곳을 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 뛰어 들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다 치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기적은 바로 우리에게 실로암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 실로암의 물이 마를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세상의 물을 갖다 놓을 때입니다. 모두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만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마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철철 넘치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말씀이 충만하고 성령이 마르지 않아도 본인이 담그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그 눈을 씻어서 뜨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의심하여 불순종했더라면 그의 눈은 고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에 수리아 군대 장관 나아만을 기억하십니까(왕하 5장). 그가 한센병이 걸렸는데 자기 집에 붙들려온 이스라엘 계집종의 이야기를 듣고 한센병을 고쳐보려고 엘리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그냥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씀만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이 말리는 바람에 참고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한센병이 치료가 되면서 완전히 새 살이 나왔습니다. 바로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음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사실 믿음이 아니지요.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알기는 알아도 성경 말씀이 병을 고치고, 죄를 이기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여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시각장애인처럼, 나아만 장군처럼 순종하면 기적을 체험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소망이 없이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던 이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만나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사람이 변해 버렸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눈이 떠져서 왔으니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8-9절). 그들이 의심을 하니까 자신을 증명하면서, 어떻게 눈이 떠졌는지 설명을 합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2절)!
   즉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듣기에 말도 안 되는 치료 방법이었으나 그대로 믿고 순종했을 때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에게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은 굉장히 신앙이 좋은 랍비들이나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해야 응답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고 계셨으며, 먼저 찾아와 주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심으로 그 사랑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그를 완전히 딴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며, 그 치료의 빛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영혼을, 병든 인생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치료를 받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픈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인과응보 사상이나 운명론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앞으로도 어떤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 위하여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축복과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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