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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04-22 (금) 12:4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28    
선한 목자는 . . .(요한복음 10:11-21)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하다’라는 뜻이 ‘착하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 한자의 뜻이 착할 선(善)이라고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몇 주일 전에 비성경적인 ‘인과응보’나 ‘권선징악’ 사상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 ‘선(善)’에 대하여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하다(good)’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5일에 걸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God saw it was good)”(1:4,10,12,18,21,25) 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까지 다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상)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에서 말하는 ‘선하다’의 뜻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일들을 선하다고 하십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은 선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임을 알고도 하지 아니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냥 넘어갈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심각하게 묵상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들, 기뻐하시는 일들은 반드시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신의 양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온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자기 양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그런데 오늘은 자신이 목자로서 어떤 목자냐 하면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합니다(11절, 14절). 이 말의 헬라어 원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목자, 선한 분(the shepherd, the good one)” 입니다. 즉 우리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해서 선한 목자라기보다 예수님 자체가 선한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왜 예수님이 선한 목자 인지 그 이유를 두 가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양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만 무려 네 번을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11절하, 15절, 17절, 18절).
   그런데 삯군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삯군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당시에 많은 양을 소유한 목자는 품삯을 주고 양치는 목자로 고용한 사람을 뜻합니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12-13절)라고 하였습니다.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가 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돈을 보고 일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양 떼를 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망쳐 버리고 양들은 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양이 죽든 살든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양들이 이리에게 잡혀 먹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삯군 목자는 선한 목자, 좋은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지도자들이 사사로운 이익이나 명예를 위하여 양들을 돌본다면 삯군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11절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할 때에 “위하여(for)”라는 헬라어 전치사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예수님께서 택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대속 사역을 설명할 때에 사용되었습니다(예- 15절, 요 6:51, 11:50-51, 18:14, 눅 22:19, 롬 5:6,8, 8:32, 고전 11:24, 15:3, 고후 5:14-15, 요일 3:16 등). 어떻게 자기 생명까지 버리면서 양들을 지키시며 구원하실까요?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절대로 가볍게 듣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말 우리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가?’ 성경은 ‘그렇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의 권세로부터,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대신하여 죄에 대한 심판을, 저주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이 힘이 없어서, 늑대나 이리, 혹은 더 무서운 맹수보다 약하여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강도와 싸우다가 잘못해서 죽음을 당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18절을 보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얼마든지 그들을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그 목숨을 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메시아로서 능력이 있으면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외치는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끝까지 고난을 참으시고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큰 위기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진노를 면할 길을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삯군처럼 자기의 위험으로부터 피하고 그냥 인간들을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 모두는 멸망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하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예수님처럼 내 능력, 내 생각, 내 고집, 내 이기적인 마음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내 자신은 충분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를 생각하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 일이 고통스러워도 기꺼이 나를 내려놓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특별한 사랑을 말합니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사랑하는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이 양들을 잘 알고 양들도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절)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예수님께서 양을 ‘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하신 것은 피상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몇 마리고, 양이 새끼를 배었는지, 병들었는지 정도를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삯군도 압니다. 그러나 삯군은 양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속 마음까지 꿰뚫어 안다,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안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에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외로움,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잠시 잡고 있는 사탄은 갈수록 ‘나와 너’ 사이를 갈라놓고 높은 벽을 쌓습니다. 알아 주고 이해해 줄 만한 어떤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남을 알아줄 수도 없고, 알아줄 틈도 없고,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삭막해지고, 나는 외톨이가 되어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 깊이 알아주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지도자들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제 말에 공감을 하시던 안 하시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외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의 속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에 약한지, 왜 불안해 하는지, 왜 자주 넘어지는지, 왜 울고 있는지, 왜 기가 죽어 있는지 우리 주님이 다 아신다고 합니다.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여러 시험과 유혹을 받아 보셨기에, 고난을 당해 보셨기에 잘 아신다고 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분, 선하신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구나’는 외로운 생각이 들면 우리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분께서 여러분을 잘 아신다고 합니다. 잘 아신다는 이야기는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들이 찾아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알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도와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까? 하물며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하신 주님께서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런 주님을 확실히 믿고 우리는 다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하신 말씀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은 올해 종려주일입니다. 2000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30년 간은 육신의 부모를 도와 집안 일을 하시다가, 마지막 3년 동안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나타내 보이시고,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갈보리에 오르시기 전, 구약에 예언되어진 말씀(슥 9:9-10)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잘못 오해하여 그 나라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왕으로 알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맞이하지만, 며칠 못되어 한 입으로 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가, 무지가 하나님의 아들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을 통과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의 오해와 무지조차도 사용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그렇게 버리셨습니다. 자신의 독생자조차 버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도 선한 목자가 되셔서 묵묵히 그 고통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명령 앞에 자기의 목숨조차 기꺼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가 아닙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하여 ‘선하다’, ‘내가 보기에 참 좋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십니까? 선한 목자되신 주님처럼 하나님 앞에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사십니까?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기뻐하실 일이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4:16)고 하였습니다. 옆에 계신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형제 자매들을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무작정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다 안다고 하십니다. 삯군과는 달리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신다고 합니다. 제발 그런 나를 믿고 모든 염려와 걱정을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우리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안아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되라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런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처한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고통 중에 있다 하더라도, 선하게 인도하실 선한 목자를 믿고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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