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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07-13 (화) 01:0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55    
[7/11/10] 부흥은 참된 예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흥은 참된 예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4:20-26)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늘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상한 마음과 갈급한 심령으로 지날 때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복과 치유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이 회복과 치유를 가리켜 부흥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흥은 우리 심령이, 영혼이 새로워지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부흥은 참된 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이 체험하면 기도와 찬송 소리가 달라집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되면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됩니다. 이전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게 되고, 이전에 음란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그런 죄 짓는 생활을 청산하게 됩니다. 이유는 은혜를 받고 나니 더 이상 죄지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은 물론, 사마리아 전체에 부흥이 시작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거의 창녀나 다름없는 방탕한 생활을 하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를 받게 되고, 영적으로 죽었던 사마리아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꿰뚫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충격을 받고, 주님을 선지자로 고백하였었습니다(19절).
    이어서 이 여인이 예배에 대하여 묻고 있는데, 이 여인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구약 가운데서도 모세오경만을 가지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으시는 죽은 예배를 세겜 가까이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그리심 산에서(창 12:6-7) 드리고 있었습니다(20절, 22절상).
    하지만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 여인처럼 단순히 모이는 장소나 의식으로만 알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렀다고 합니다(21절). 22절에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심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유대인 혈통에서 나지, 사마리아에서 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영이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찾고, 만나는 것이 예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23-24절). 지금은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복음의 시대, 신약 시대의 축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즉 사람이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 그 사랑과 지혜, 진리와 거룩, 긍휼과 자비, 전능하심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찬미와 경배를 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와 주위에 우상을 섬기는 다른 부족들의 예배의 가장 다른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는데 비해, 다른 부족들의 예배는 자기들 안에 있는 종교적인 감정 혹은 욕망의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지한 순간이 되면 기도하는 마음이나 자세가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도하는 순간은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시간으로 알고 있고, 자기를 위하여 누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본성과 우상 숭배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우상 숭배는 종교심이 타락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종교심은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영혼의 갈증, 즉 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나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역시 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자기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제사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자기 안에 얼마나 깊은 죄의 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은혜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간접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끊임없이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간접적인 은혜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예배를 통하여 자기 안에 있는 종교심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모세는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과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6)라고 표현하면서 그 예로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죄를 속할 필요가 없는 예배였고, 인간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만족시켜주는 예배였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태양이나 무슨 짐승처럼 인격이 없는 분이 아니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자기 안에 있는 서러움이나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의 제사가 필요했던 이유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속하는 피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는 과정에서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렸고, 또 짐승을 태우는 과정에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후에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피의 제사가 필요했고, 그 후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예배 행위 자체로 자기 만족을 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사 자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했을 때에 그들의 예배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 안에 있는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배가 얼마나 엄숙하느냐 엄숙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싫어할 때에 이방인들의 예배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에는 아무리 형식이 초라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그 예배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임하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하여 직접적인 자기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한 시간의 예배 그 자체로 종교적인 갈증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자꾸 감각적으로 변하게 되고, 사람들의 말초 감각을 자극해서 ‘은혜’를 받게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생활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며, 생활을 통하여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설교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는데, 어떤 예배가 신령(in spirit)과 진정(in truth)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신령과 참,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는 단번의 제사를 드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교회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약교회는 구약의 성전보다 더 완벽한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쉽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영으로,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눈 앞에서 짐승을 잡아 죽임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짐승을 죽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죄의 선포를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영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것을 그저 눈에 보이는 목사님의 강연을 듣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상이 없는 예배를 드립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상이든 우리 눈을 가리면 안됩니다. 눈으로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는 모두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일어서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 우리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또 사죄의 은혜를 받는 것,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헌금을 드리고 또 설교자가 축도 즉, 교인들을 축복하고 파송하는 것 각각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 전에 이루어지는 죄의 고백이나 용서의 확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던 번제에 해당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신앙을 확인하는 신앙고백과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순서가 건성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찬양대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있는 찬양이 예배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말씀을 사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죄성을 가진 목사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신 하나님 영광의 절정, 영광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예배가 은혜가 됩니까? 바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깊은 갈급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죄 문제이고 죄가 파생시킨 수많은 상처들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인간의 깊은 본성을 해부하여 죄를 치료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는 성령의 역사의 도구입니다. 그러니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무자격 의사가 사람을 수술하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없는 목회자일수록 다른 것을 끌어오려고 합니다. 예배당을 꾸미는 데에, 설교를 많은 찬양으로 대신하거나, 연극을 동원하기도 하고, 별별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의 종교성을 자극하여 은혜를 끼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성도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은 정직한, 바른 목회가 아닙니다. 목사는 말씀의 종입니다.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소명입니다. 기도하며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여 오늘날 고통 받으면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참 의미를 전해줄 사명을 지녔으며, 이 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아닌 것으로 교인들의 종교심에 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은 김남준 목사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신학적인 매춘행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살아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이 목사가 더 이상 교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눈치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적인 목사라는 칭찬을 받을 생각도 하지 말고, 말씀 하나만 붙들고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입에서 영감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교인을 잃을 각오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외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강대상에서 멱살을 잡혀서 끌려 내려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바로 전하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저를 비롯한 교역자들이 그런 말씀이 종들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참된 예배에 관하여 말씀을 듣고 난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모세가 예언한 메시아 곧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25-26절). 귀한 만남을 통하여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죄의식과 열등감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녀에게 부흥이 임한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동네 모든 사람에게 자기를 싫어하든 않든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전합니다(28절).
    여러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부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의 회복이, 치유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마음의 병이 있습니까? 불안합니까? 우울증으로 고생합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고통과 미움 때문에 여전히 괴로워하거나, 아는 죄를 끊지 못하여 죄책감 속에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예배 시간에 사람만 눈에 들어오고, 인간의 소리만 귀에 들어옵니까? 나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는데 습관화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로 모인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 죄를 덮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는 모든 세상적인 자랑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순서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배 전체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관망하는 자세로 임하지 말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내어 놓고 정말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자 갈망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내가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예배와 생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 드리러 오면, 예배가 어색하고 강대상이 멀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뒷 자리에 앉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 내내 쓸데없는 염려와 잡생각에 빠져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에 임하면 예배 시작부터 찬송에 힘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는 내 심령이 변화 받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늘 그런 예배를 드림으로 예배 속에 항상 하나님을 만남으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 부흥을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가 하나님께 사랑 받고 있는 자녀라는 인식이 새롭게 되면서 그렇게 마음이 기쁘고 시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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