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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09-12-01 (화) 05:5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34    
[11/29/09] 오늘도 성령행전은 계속된다
오늘도 성령행전은 계속된다 (사도행전 28:11-31)
오늘로서 사도행전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오늘날 사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은 마치 미완성된 책처럼 끝나버립니다. 이유는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내용들이 다 들어있기에 성령께서는 누가에게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서 사역하는 내용 중에 사도행전(Acts of Apostles)을 마치도록 합니다. 누가는 바울의 전기문을 기록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어떻게 초대 교회들이 세워졌고, 로마에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는지를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것 같으나 사실 오늘날 교회들에게는 그 어느 신약 성경책 보다도 소중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오늘도 동일하신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기에 성령행전은 계속된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로마에 드디어 도착하게 됩니다. 말타 섬에서 겨울 3 개월을 지내며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제 디오스구로(Dioscuroi)라는 이름의 큰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시실리 섬의 수라구사(Syracuse)를 지나 레기온(Rhegium)을 거쳐 보디올(Puteoli)에 먼저 이르게 됩니다(11-13절). 누가가 그 배에 새겨진 기호를 이례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디오스구로라는 이름은 제우스(Zeus)와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Leda)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키는데, 당시 뱃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널리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지난 번 유라굴로 광풍도 이기지 못한 그들의 수호신이었음을 암시하며, 디오스구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광풍 가운데 그들을 지킨 것은 다름 아닌 우리 하나님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보디올에서 바울 일행은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이레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14절). 물론 이일은 로마 백부장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몇 해전 3차 전도여행이 끝날 즈음에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적어서 여 집사 뵈뵈의 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붙들어 주었고, 그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보디올 항구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로마에서 125 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달려와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보디올에서 로마로 도보로 여행하는 가운데, 로마 가까운 압비오 저자(Appii Forum)에서와 또 삼관(Three Taverns)에서의 로마 교인들의 환영은 바울에게 적지 않은 격려와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15절). 그래서“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절하)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에 이렇게 누군가 격려와 위로를 해 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주위에서 주님 위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애쓰시는 분들을 보시면 격려와 위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욱 열심히 담대하게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16절에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합니다. 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이 중요합니까? 지금까지 로마는 전승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었는데, 주후 50년 경 로마 글라우디오 황제의 명령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됨과 함께 교회는 망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4년 후에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불안전한 상태에서 교회를 다시 재건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바울이 쓴 로마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직접 로마에 도착함으로 영적으로 대대적인 부흥이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예루살렘의 부흥은 그곳에서 잡히고 감금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로마에서는 이방인들이 충분히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밭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전 세계의 중심지로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모든 향락과 사치, 방탕의 극치를 보인 사탄의 도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에 사도 바울을 보내셔서 사탄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을 빼내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이전 전도여행처럼 로마의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로마에 오게 된 배경과 복음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왜 자신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죄수의 몸이 되었는지 설명합니다(17-20절).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조상들의 관습이나 전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그들이 로마인의 죄수로 내 주었고, 로마인들은 자신을 심문해도 죄가 없어 내어주려고 했으나 자기 동족들이 반대하여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로서 황제에게 상소하여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과는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바울과 그 유대인들과의 차이는 20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이냐 아니면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부활 관련된 것이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행 23:6, 24:15, 21).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로마 유대인들도 바울에 관한 편지를 예루살렘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좋지 않게 이야기한 적도 없으니 사상을 이야기해 보라고 합니다(21-22절).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파(sect), 즉 도에 대하여 어디서든지 반대를 하는 유대인들이 많은 것은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날짜를 잡고 바울에게 다시 와서 그의 강론을 듣습니다(23절).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구약성경 즉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을 선포하며 믿으라고 권고합니다. 혹은 믿기도 하고 혹은 믿지 않습니다(24절). 서로 믿음의 차이로, 소망에 대한 차이로 유대인들이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로마제국을 뒤엎고 그들의 나라를 회복하게 되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바가 다르면, 소망이 다르면, 꿈이 다르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백성, 같은 공동체라 하더라도 문제가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방법은 좀 달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가면 됩니다. 하지만 꿈이, 목적이, 도착점이 다르면 함께 못 가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경향가든교회도 교인들이 믿는 바가 같아야 합니다. 소망이 같아야 합니다. 꿈이 같아야 합니다. 교회의 꿈이, 목사의 꿈이 교인들의 꿈과 서로 다르다면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나고 분열되고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구역과 지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들의 믿는 바가 다르고, 비전이 다르다면 따로 국밥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흥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 교회의 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수히 많은 이민 교회들 가운데서도 좀 모델 교회로 세우고 싶지 않습니까? 완전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의 몸을 입고 있는 한 말입니다. 주님 재림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하여 본이 되는 교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하여 그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잘 배우고, 실천하여 이 곳에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을 보면서,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꿈 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이 험악한 분위기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자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제 구원의 좋은 소식은 보다 갈급한 심령을 가진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됨을 증거합니다(26-28절).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많이 믿으면서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1절)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이 구금되어 있는 셋집을 중심으로 만 2년을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합니다. 주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고 로마에 붙들려서 쇠사슬에 매어 놓고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로마 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아주 강한 교회로 세워집니다. 그러다가 3년이 채 못되어 로마의 황제까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나라의 국교로 기독교를 선포하게 됩니다.
물론 2년 후에는 시위대 감옥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 바울은 감옥 안에서 그 유명한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저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최선을 다하면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사실 오늘 본문의 절정은 마지막 31절입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더 기록되어야 할 책이 갑자기 끝이 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치는 데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비록 복음을 전하며 성경을 가르칠 때에 핍박이 있어도, 방해가 있어도 중단될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묶어둘 수는 있어도 복음을 묶어둘 수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묶어놓을 수 있어도 말씀은 묶어놓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유럽 전체를 휩쓸었고, 로마 천주교가 타락해갈 때에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유럽이 새롭게 되고, 그 중 청교도들에 의하며 미국으로 건너와 전파되었으며, 미국에서 아시아로 해서 우리 나라에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사도들을 대신하여 성령행전을 써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지 써 나아가야 합니다.‘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하면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멈출 수 없는, 멈추어서는 안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하면서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않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 합니다. 더 심령이 갈급한 영혼들에게 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행전을 써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흥이 일어나야 하고, 여러 가지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야 하며, 사탄 마귀들로부터동서남북에서 우겨쌈을 당하여도 이 영적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얼마나 사탄 마귀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자기들 나라에 속하게 하려고 말입니다. 아니 교회들마저도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령행전을 써 나가려면 사도 바울과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굴하지 않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하는 투지와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연약한 부분이, 약점이 있어도 오히려 내 안에 계신 능하신 주님을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강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 모두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오늘도 계속되는 성령행전을 써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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