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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3-14 (토) 00:3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09    
[3/8/09] 믿음의 용기
믿음의 용기 (사도행전 21:1-16)
자녀를 길러보면 어릴수록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는 자기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잘 싸우고, 자기 것만을 고집하며 떼를 씁니다. 나눌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철이 들면, 성숙해지면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려하며 나누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하게 되며, 때로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기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떼를 쓰고 잘 싸웁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배려하고 나눌 줄을 압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다른 영혼 한 사람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찾게 됩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가진 자의 용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이 그런 믿음의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장에서 20장까지 바울은 1차, 2차 , 3차 전도여행을 다 마무리 하면서 그 마지막을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헤어지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여정을 서두릅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란이 있는 것을 성령의 가르침을 통하여 알면서도(행 20:22-23), 성령의 매임을 받아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이들에게 나의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면서 떠납니다(20:38).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 결국 로마에까지 이르는 여행 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밀레도를 떠나 예루살렘에서 60마일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이르는 장면입니다. 이 긴 여정에서 만나는 동역자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당할 어려움을 예상하고 가지 말라고 극구 말리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밀레도를 떠나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배를 타고 구브로 섬을 패스하여 두로에 상륙하여 짐을 풀었습니다(1-3절). 이 두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 일주일을 머물게 됩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교회를 개척해 본 일이 없습니다만, 그 곳의 제자들이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4절하)고 합니다. 해석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어째서 동일한 성령이 바울에게는 가라고(20:22) 하고, 두로의 제자들에게는 아니라고 하였습니까? 그럴 수가 없지요. 이 구절은 두로의 제자들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과 환란이 있음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셔서 알기에 만류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일행은 떠나가니 전송을 하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작별을 하였습니다(5-6절).
왜 바울과 그 일행은 동역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요? 목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첫째는,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해를 풀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주의에 젖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만 구원을 베푸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죄가 아니고,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는 것을 목숨 걸고 당당하게 입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대부분의 사도들을 중심으로한 유대인 교회와 베드로와 바울의 말씀을 듣고 믿은 이방인들 중심으로한 이방인 교회가 거의 분리되어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진 확신은 교회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유대인, 이방인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 예루살렘에 흉년이 든 것을 계기로 전도여행 중에 모금한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전달함으로써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반대해도 바울은 그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참고: 롬 9장-11장). 그러므로 이번 오순절에 자신이 가서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외침으로 새로운 오순절의 기적을 다시금 체험하기 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번 예루살렘 행은 그 동안 자신이 힘쓴 사역의 결산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을 돌아보고, 교회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서 그 동안 했던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결산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기에 용기를 가졌던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힘으로 밀어 부치거나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모르고 당하는 것은 시험이 되지만 알고 미리 충분히 대비한 것은 시험이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것이 확실한 하나님의 뜻임을 더욱 알게 한 것은 선지자 아가보를 가이사랴에서 만난 것입니다.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유명한 전도자 빌립을 만납니다(7-8절). 아마 바울은 거기서 큰 격려를 얻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빌립은 바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전도에 불이 붙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지역의 부흥의 장본인은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흥을 맛보면서도 갑자기 아무도 없는 광야에 가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전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이가 들어 늙어가는 처지에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주님의 은혜를 나누었겠습니까? 삶의 목적이 같은 사람이 만나면 서로에게 힘이 되지 않습니까?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니고 이 좁고도 협착한 길을 나 말고도 가는 사람이 또 있어서 만나게 되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가 참으로 귀한 것이라고 몇 주일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몇 날을 빌립의 집에서 보내고 그 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하는 것도 보면서 지내다가 유대 지역에서 온 선지자 아가보를 만납니다(9-10절). 이 아가보는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던 사람입니다(행 11:28). 이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팔 다리를 잡아매면서 성령께서 계시하는 말씀을 합니다(11절). 바울이 그렇게 묶이게 되고, 이방인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다시 너무 확실한 선지자의 예언을 들은 누가를 비롯한 많은 동역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12절). 이번에는 울면서 통사정을 합니다. 그 때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고 합니다.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아프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담대한 바울입니까? 얼마나 단호한 바울입니까?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겠습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 목적을 분명히 깨달아 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반드시 풀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삶이었기에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담대함이 누가를 비롯한 옆에 있는 동역자들까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14절). 한 사람의 믿음의 용기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담대해지도록 한 것입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까지도, 나손까지도 합세하여 예루살렘에 이르게 됩니다(15-16절).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믿지 않는 자들도 자신이 가진 신념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나라에 대한 애국충정이 목숨까지 버리며 싸우게 하지 않습니까? 극단적 모슬렘들은 알라 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 테러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목숨을 걸고 자신들이 믿는 일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고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까? 만왕의 왕되신 주님을 위한, 나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위하여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은혜를 받은 우리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각오로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주셔서 온갖 모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를,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만을 위해, 나의 자녀들의 웰빙을 위해서만 산다면 되겠습니까? 계속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젖만 빨고 있겠습니까? 그저 사랑만 받고 있겠습니까? 철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셔도 그 하는 일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Christians 이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할 각자의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을 할 때에 좀 힘들어지고, 손해가 나고, 위험이 따른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라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말입니다. 바울은 자꾸 연약해지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하였고,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앞 일에 대하여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 사랑, 근신하는 마음을 주셔서 담대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어야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세미한 음성 가운데 배운 것이 있다면, 마음에 확신이 드는 일이 있다면 용기를 가지고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 일을 감당할 때에 어려움이, 고난이 올 것을 안다 해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비겁한 자가 됩니까? 내가 꼭 가야할 길임을 알고도 겁을 내며 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 길을 위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듯이 동역자들과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해 보았습니까?
때로 가족이나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 마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분명한 뜻을 모르기에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해야 하고, 가지 말라고 말려도 가야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바라보며 앞을 향하여 가야하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외롭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니 담대히 가서 정복하자고 했습니다(민 13:30). 비록 그 땅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거인이요, 용사들이라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야빈 왕으로부터 20년간 고통 받다가 그 군대 장관 시스라와 대적하라고 드보라 사사는 바락에게 용기를 부어주지 않았습니까?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셔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삿 4:14). 이새의 막내 아들로 아비의 양을 치던 어린 목동 다윗은 감히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이기지 않았습니까?(삼상 17:32-37). 청소년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여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단한 후에 나중에 사자굴에 던져지더라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용광로와 같은 풀무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이겼습니다(단 3:16-18). 일제시대 때에도, 한국전쟁 중에도 믿음의 용사들은 세상의 세력에 굽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믿음을 지키느라, 사명을 감당하느라, 삶의 목적을 따라 사느라 큰 고난을 만났어도 불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을 붙드시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자꾸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앞으로의 닥칠 어려움을 미리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감당하게 하시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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