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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03-28 (목) 05:02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04    
채찍질하고 조롱하며 때리더라 (요 19:1-3)
때때로 우리는 큰 그림을 놓치고 작은 것들에 얽매어 힘들어 하고 스스로 마음 아파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좀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사는지, 그 목적을 놓치면 안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 이유를 놓치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의 고난 중 일부의 모습입니다. 오늘 새벽에 살펴본 대로 우유부단한 빌라도의 태도로 말미암아, 진실보다는 군중의 여론에 밀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을 언도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제일 먼저 한 것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것입니다(1절). 이는 십자가 처형의 전 단계로서 하는 심한 채찍질이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두 번씩이나 유대인들에게 언급하였습니다(4절, 6절). 아직 십자가 처형 판결이 확정되기 전입니다(16절). 그러니까 빌라도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죄는 십자가에 처형할 정도가 아니라 적당하게 채찍질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무마하려고 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은 채찍질뿐만 아니라 가시 면류관도 씌우면서 때리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마치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2-3절)고 하였습니다. 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하며 조롱합니까? 어쩌면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이 있는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까 그 분풀이를 쏟아 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악한 것이 있다면 같은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때린다는 것은, 채찍질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에 가까운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 당하신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에서 언급하였듯이,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라고 이사야 53장 5절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즉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을 대신 맞으신 것이며, 우리가 조롱 당해야 할 것을 대신 당한 것이며, 우리가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야 마땅한 것을 대신 받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벌을 받아야 할,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의 겉 모습은 점잖고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겨 보십시오. 그 안에 온갖 추한 죄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알면 모두 다 비웃으며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때리고 침 뱉고 아무리 못된 짓을 하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 안에 아직 죄성이 있기에 때로 우리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죄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폭로할 것 같습니다. 그저 겉 모습만 보고 누가 나를 존경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면 ‘아, 저 사람은 잘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한다. 아직 내 속에는 무서운 죄가 있고 부끄러운 실수들이 있는데. 아직도 나 만이 알고 있는 위선적인 모습이 있는데’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대신 그 조롱을 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으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서운 채찍을 맞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 앞에서 조롱을 받고 맞으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의 위선과 거짓을 고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달려가야 합니다. ‘주님 얼마나 아프십니까? 내가 맞아야 할 것을 주님께서 다 맞으셨군요. 내가 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통을 주님께서 다 당하셨군요!’ 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괜찮다. 이제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받지 말고 믿음으로 떳떳하게 살아라’ 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데 거저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 안에 억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속이면서 살아왔습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정말 부끄러운 부분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경멸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들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채찍질을 맞으며, 조롱을 당해야 할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할 모든 치욕을, 저주를 주님께서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돌아올 치욕이, 저주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족하지만 이 모습 이대로 주를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수고한 일에 대한 칭찬과 영광과 면류관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그 자리, 조롱 당하시며 손바닥으로 맞으신 그 자리, 흘리신 피가 그토록 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를 누르고 있는 죄의식, 수치심을 벗어 버리십시오. 남몰래 지어온 죄들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청결한 양심을 회복하십시오.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립시다. 기도와 간구를 드립시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시며 그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내일 지을 죄의 삯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추고 또 감추려 하는 부분들을 믿는 자들은 너무나 쉽게 남에게 고백합니다. 이유는 이미 그 상처가 아물었고 치료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직도 주위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소리 대신 주님의 채찍질 당하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 죄 짓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감추어 놓은 은밀한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부끄러운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대신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고통 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귀에 그 채찍 소리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조롱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신음하시는 소리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속이려고 할 때마다 그 무서운 채찍 소리와 신음 소리가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엄청난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으니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서, 다른 사람이 조금 잘못했다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것만은 안돼’ 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관련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마 18:23-35)?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하면 됩니까?’ 물었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대답하신 후에 주신 비유입니다. 어떤 임금이 종들과 계산을 하는데, 오늘날의 돈으로 약 천 만불 빚진 종이 갚을 것이 없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사정을 하여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이 사람이 가서 자신에게 약 8천불 빚진 친구를 붙들어 목을 잡고 돈 내노라고 하니, 그가 조금씩 갚아 나갈 테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데도 그만 옥에 가둡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이 크게 진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2-33절) 하고 잡아들여 그를 옥에 가둡니다. 큰 긍휼을 입었으면 작은 긍휼은 베풀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받은 상처가 작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비웃음과 조롱들이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저렇게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주는 십자가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 속의 교만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자기 보다 약한 자를, 낮은 자를 때리고, 말로 날카롭게 공격합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 앞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많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인간의 교만을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이 포악하고 교만해질 수 있다는 상징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속한 사회에, 교회에, 가정에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사람의 교만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조롱할 때 그 사람은 완전히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원수는 분노의 감정이요,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주님께서 맞으셨던 채찍의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남이 미워질 때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우리 사회에는, 심지어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싸움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이 죽어져야 평화가 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깨달았으니 당연히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생각하고 우리가 당하는 쪽이 되어야 합니다. 지는 쪽이 이기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받았으니,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여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잘못과 실수가 용서되고 용납이 되는 공동체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때리고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면 내가 죽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에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아무리 입으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박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의 죽어야 할 부분이 죽지 않으면 내가 예수님을 다시 못박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분들이 회개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분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예수님을 못박겠다고 나오는 오늘날의 대제사장들, 유대인들 혹은 로마군인들처럼 됩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의 은혜에 젖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아를, 교만을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은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마귀를 위해 일할 뿐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예수를 죽게 만들고, 결국에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가정이 어렵습니다. 결국 분쟁과 분열이 생깁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 고집과 내 의지, 내 야망, 내 헛된 모든 욕망이 죽어지는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하여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배를 은혜스럽게 드렸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결단은 예배를 통하여 ‘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제물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숨을 쉬는 우리의 몸이지만 심령을, 자아를 죽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였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채찍질을 맞으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 조롱과 모욕을, 십자가에서 신음하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맞았아야 할 채찍, 조롱과 모욕,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지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큰 그림을 보셔야 합니다. 작은 것들에 얽매어 나 자신에게 스스로 고통을 주고, 자신을 작게 만들면 그야말로 졸장부가 됩니다. 그 고귀한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넓은 마음으로 크게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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