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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1-01 (목) 23:44
분 류 수요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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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34    
이웃 사랑(신 22:1-12)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허락하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모든 우상과 음란을 물리치고 정결하고도 건전한 나라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히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이웃의 소나 양을 통하여 이웃의 형편을 살펴주고 배려하라고 합니다. “내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로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1-2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네 형제”라 함은 친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동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교인들을 볼 때 그 사람을 남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형이나 동생, 누이로 볼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물론 형이 동생을 괴롭히기도 하고, 오빠가 여동생을 울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남이 아니라 한 형제, 자매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내 형이나 누이의 소나 양으로 생각한다면 계속 길 잃고 헤매다가 맹수에게 잡혀 먹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보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본 이상은 그 소나 양을 챙겨서 돌려 줄 것입니다. 만약 먼 곳에 그 주인이 있다면 며칠 동안 돌보면서 찾아가게 할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서로 약간 관심만 가지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이기에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못 본체 하지 말고 도움의 손길을 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웃의 모든 행복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 책임질 수도 없고, 다 책임지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저도 교인들의 어려운 문제를 상담하다가 내가 다 책임을 지려고 하면서 밑바닥을 헤매는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나름대로 힘을 내어서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실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때로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죄책감이 드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기 스스로 일어서야 앞으로도 모든 문제를 자기 자신이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돕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오늘 말씀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즉 물론 능력이 되면 다 도와야지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형제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데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은 잘못입니다(약 2:15-16).
본문 1절, 3-4절에 보면 “못 본체 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즉 우리 주위의 형제나 자매가 어려움이 빠져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막상 그 어려움을 당한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찾아가서 돕고 물건을 돌려주면 그 사람이 얼마나 기쁘고 고마워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를 다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노숙자들을 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먹여 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조금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어서 일어서는데 힘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 같습니다. 8절을 보시면 집을 지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지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집들은 대게 지붕이 편편합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서 무슨 일을 할 때 지붕에서 떨어져 사람이 다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여 난간을 만들어 놓으면 그 사람이 다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이 지붕에서 떨어져 다쳐서 피가 나게 되면 그 죄가 그 사람 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계명을 강조하셨습니다(마 22:39; 레 19:1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면 그 후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있다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만 생각할 수 있어도 우리는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그런 대접을 받기 전에 먼저 남을 대접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행복을 위하여 남의 행복을 깨뜨리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니 만들어가고 계시는 너무 귀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 사랑의 첫 걸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도 잘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옷 입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5절). 남자가 여자 옷을 입지 말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다고 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다고 해서 힘이 세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잘 인정하고 그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할 때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자기가 아닌 것이 되고자 할 때에는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이어서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조차 그런 관심을 베풀고 배려하라고 합니다. 우선 새를 잡을 때 어미와 어린 새를 다 잡지 말라고 하셨습니다(6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미와 어린 새를 다 잡아버려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다른 생물들이 멸종하도록 해서는 안 되고,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사람들이 법으로 물고기나 게를 잡을 때 작은 것은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주 성경적입니다. 욕심을 부려서 작은 것들조차 잡아 먹으려고 한다면 남는 것들이 없을 것입니다.
또 포도나무 씨를 뿌릴 때에 두 종자를 섞어서 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9절). 포도나무도 종자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만약 강한 종자와 약한 종자를 같이 뿌리면 약한 종자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약한 종자도 나름대로 좋은 특성이 있는데, 강한 것에 눌려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한 종자도 자기 나름대로 자생력을 길러서 강하게 되야 하는데, 약한 것을 죽이고 양분을 빨아 먹기 때문에 자생력을 잃어버려서 나중에는 강한 종자도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과 강한 것을 붙여서 경쟁을 시키지 말고 약한 것은 약한 것대로 특성을 살리고, 강한 것은 자기보다 약한 것을 상대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도록 포도농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라도 억지로 심지 말고 특성을 살펴서 마음껏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농사를 지어야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을 때 소나 나귀에게 같이 멍에를 매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0절). 이스라엘 농사는 우리와 달리 소 두 마리가 같이 멍에를 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소나 나귀처럼 성질이 서로 다른 두 짐승이 멍에를 같이 매게 되면 나귀는 성질이 급해서 빨리 가려고 하고 소는 성격이 느려서 천천히 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서로 속이 상하게 되고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느린 것은 느린 것끼리 멍에를 메우고 급한 것은 급한 것끼리 일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더러 나귀처럼 되라고 하거나 나귀더러 소처럼 되라고 하면 짐승이지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마음에 그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려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가야 합니다. 즉 예수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빨리 빨리, 강하게, 높이 하면서 급하게 몰아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온유하고 겸손함을 배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이 가벼워 마음에 쉼을, 안식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속 힘이 드는 것입니다.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옷을 짤 때에도 서로 다른 실을 섞어서 짜지 말라고 합니다(11절). 아시다시피 양털은 동물성이고 베실은 식물성입니다. 그래서 실의 신축성이나 장력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성질이 다른 실을 섞어서 짜면 결국 실끼리 서로 당기게 되어 강한 쪽으로 쏠려서 옷이 상하게 됩니다. 오늘날에야 합성 섬유가 있기 때문에 서로 섞어서 짜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만, 당시 천연섬유 밖에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마 9: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낡은 옷에 한 조각 새 천을 하나 붙인다고 해서 그 옷이 새 옷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헌 옷이 새 옷이 되려면 완전히 새 실로 새로 짜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마음에 복음적인 천 조각 하나를 붙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 실로 짜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짜야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입는 겉 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12절)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의 겉 옷은 대게 통으로 되어 있어서 네 개의 모서리(귀)가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 네 모서리에 술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구별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이 술을 단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선민임을 알고 깨닫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속에 들어있는 선민의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들은 거룩한, 순결한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베풀어야 합니다. 정말 내 친 형제처럼 생각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고유하게 각 사람을 창조하심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창조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또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도 배려를 하고, 각각 고유하게 만드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 믿는 자들은 이 세상 불신자들과 달리 순결하고 정결하게 살아 구별된 백성임을, 정말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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