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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7-08 (월) 07:5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17    
방언의 은사(2) (고전 14:20-33)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14장, 오늘 본문의 두 번째(20-25절)와 세 번째 단락(26-33)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의 목적과 예배 시간에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올바른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방언의 은사는 옆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개인의 덕을 위한 것이므로 교회에는 별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간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선 고린도교인들에게 지혜로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고 권면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지혜라고 했지만, 원어는 생각(thinking), 이해(understanding)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생각을 좀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다만 악한 것에 대하여서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이 겁을 내고 도망치듯이 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교인들은 말씀을 배우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영적 체험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올바른 교리나 경건하게 사는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들 자신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에, 즉 감정에 만족하는 것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에 기록된 이사야 28장 11-1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21절) 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다른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방언으로 하지 않고, 너무나도 분명하고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아서, 다른 방언하는 자들이 쳐들어 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도 듣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들이 들려주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싫어하고, 다른 나라의 방언을 구했던 그들이 결국은 방언을 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장성한 사람처럼 지혜롭게 생각하여 똑똑히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행동에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방언의 진짜 목적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sign)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22절) 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무언인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신비한 현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방언은 그런 표적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의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이 어디 쉽게 듣겠느냐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오히려 믿는 자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믿는 자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교회에서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한다고 한다면 무식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23절). 그러나 모인 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예언한다면 듣는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24절).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세상에 나아가서도 우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고 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25절).
   그러므로 이런 말씀에 의하면 어떤 교회 교인들이 모여서 방언을 연습하면서 하라고 요구하고 한꺼번에 막 한다고 하면 비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그렇지가 않고, 또 은사라고 하는 것이 모여서 연습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방언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말씀과는 다른 가짜 방언인 것입니다. 사이비입니다. 거짓 종교인들이 흥분상태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표적을 나타냄으로 그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나타내라고 주시는 은사 중 하나가 방언이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방언을 올바로 사용해야 하는데 그 절차를 설명하고 있습니다(26-28절). 우선 예배의 모든 것,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고 합니다. 예배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이유는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인들이 바로 거룩하신 만왕의 왕을 뵐 수가 없습니다. 왕을 만나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묵상과 찬송과 죄 사함의 기도로 왕께 나아갑니다. 아무 순서가 없이 그냥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드리는 것이 신령한 예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어떤 때에는 그렇게 인도하실 수도 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만왕의 왕 앞에 함부로, 막무가내로 나아갑니까? 자신을 살피고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순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맞는 방식으로 질서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배 시간에 있는 찬송이나, 교독이나, 기도나, 설교나, 방언이나 통역 등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온 교인들을 주님 닮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세워갈 수 있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처럼 질서와 화평을 이루며, 누가 보더라도 감동을 주는 시간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에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7-28절) 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하든지, 기껏해야 세 사람이 해야 하는데, 차서에 따라 한다는 것은 한 사람 씩 순서에 따라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꺼번에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는데 반드시 통역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에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 안에서는 잠잠하라, 조용하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방언은 주로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되는 쓰임이 아니라면, 혼자 골방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도 마찬가지로 질서를 가지고 하라고 합니다(29-32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29절)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계시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자들도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셋 정도가 차례로 말하면서, 듣는 자들도 말하는 자가 정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 하는지, 개인의 생각이 들어있는지 분별하여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예언의 말씀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지혜롭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를 들어도 정말 성경을 풀어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지, 설교자 개인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지 분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는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30-31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32절)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다 겸손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시면 먼저 말하던 자가 양보하여, 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예언의 은사를 받은 어떤 사람이 흥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게 되면, 다른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를 제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덕스럽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으로 권면을, 교훈을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12장 강해할 때에 말씀드렸듯이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받아 계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와는 달리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마지막 성경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누가 새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예언한다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그에게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절)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씀으로 권면하실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어느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 분(들)을 권면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교훈도, 죄에 대한 책망도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하며, 의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다만 내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으로 한다면 옆에 있는 분이 나서서 그 분을 가로막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 말하는 사람이 잠잠하고 다른 사람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핵심은 33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섬길 때에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여기 “어지러움”의 원어는 ‘혼동, 무질서’를 뜻합니다. 화평과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앞서 방언을 사용할 때에도, 예언을 할 때에도 질서 있게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사실 혼동을 주는 것, 혼란하게 하는 것, 무질서한 것 등은 다 사탄, 마귀가 거짓의 영으로 장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지러운 예배, 무질서한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서로 논쟁하고 싸우는 봉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지요. 불신자들에게조차 욕을 얻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이 다르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며 화목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와 덕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자아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이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에 복종하여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 우리들이 되며, 그런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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