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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1-26 (월) 06:56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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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847    
자유함이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1-13)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참 자유가 주어졌습니다(요 8:32). 그런데 성경에 뚜렷하게 금하고 있지 않는 것들(아디아포라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얼만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인지는 항상 숙제로 남습니다. 예를 들면, 화투나 카드 놀이, 화장하는 것, 춤 추는 것, 극장에 가는 것, 주일에 음식을 사먹거나 운동을 하는 것 등 말입니다.
그런데 결코 이 자유가 죄를 마음대로 짓는 자유는 아닙니다. 또 그 자체는 죄가 아닐지 몰라도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면 금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고 하였습니다. 자유인이지만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보면 신자들 사이에 성경에서 명백하게 죄라고 지적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자유함에 대하여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율법주의(legalism)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모든 행동을 흑백논리로 판단하고 믿습니다. 모든 행동을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으로 분류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아니라 규례(규칙)에 의하여 삽니다. 또 다른 극단적인 반응은 자유주의자들입니다. 모든 행동에 흑(black)이, 나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가 다 백(white)입니다. 성경에서 확실히 금하고 있지 않는 한 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자유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는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원칙적으로 옳다고 해도 다 행동해서는 안 되며,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다른 형제나 자매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7장부터 고린도교인들이 묻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그들은 바울에게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라는 질문을 하여서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답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이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자유함이 있는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시험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문제가 된 사람들은 우상의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거의 모두 다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지식에 관하여 4절부터 6절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 다른 우상신들은 다 죽은 신들이고,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만물이 났고,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다’라는 지식입니다.
당시 고린도시의 대부분의 고기가 우상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죽은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 신앙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지식을 자신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이 교만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신자들 앞에서 너무 강하게 주장을 하니까 교만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머리로만 믿는 신앙이지 가슴으로 믿는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런 지식이 없는 약한 자들을 배려하여 절제하는 것이 덕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고 하였습니다. 지식이 필요하지만, 덕에 지식을 쌓아야 하고, 그리고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서 말입니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2-3절)고 하였습니다. 즉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많이 아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뭐 좀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는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교만한 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참 진리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아시는바 된다고 하였습니다(3절).
우리가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사랑하기만 하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상)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마귀가 그 틈을 타고 들어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게 유혹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합니다.
원칙적으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은 신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면서 우상이 진짜 신인 것처럼 믿게 됩니다. 참 지식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이 지식이 없거나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절)고 하였습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으면 우상신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앙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가 너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양심은 자유하지만 다른 사람의 양심은 자유하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8-9절)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우상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나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이 먹지만, 사실 그것을 먹어봐야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을 주느냐는 말입니다. 그 고기 먹지 않는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고, 먹는다 해도 만족함이 없을진대 먹는 것을 보는 연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면 먹지 않아야 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죽은 우상신이 아무 것도 아닌데 하면서 먹는 사람이 먹지 못하는 사람보다 신앙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내가 우상 제물을 먹음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신앙에 나쁜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곧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11-12절)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사탄의 세력에서 겨우 벗어나서 우상의 음식을 끊고, 술과 담배를 끊고, 도박처럼 하는 화투 놀이도 끊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거리낌이 없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연약한 교인이 지금까지 믿어보려고 발버둥친 것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지요. 정말 믿음이 좋다면 연약한 교인들을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덕을 세우겠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해야지,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서 하지 않으면 위선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물론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행동하면 자신의 양심이 불편할 것입니다. 즉 내 자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이 없으니까 주위를 둘러보고 시험들만한 사람이 없으면 먹고, 연약한 교인이나 초신자가 있어서 시험들 것 같으면 먹지 않는다면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무엇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13절)! 사실 그렇게 이중적인 잣대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위험하고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오래 살거나 빨리 죽는 것이 아니니까, 바울은 완전히 먹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자신의 영적 생활에 나쁜 영향이 있을 것 같은 미신적인 생각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다른 교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양심이 연약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솔직히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괜히 마음 속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도움을 청하고, 다른 분들은 그의 연약한 부분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절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할 수 있다 하여도 다른 사람들은 시험에 들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어떤 일을 처음 할 때에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한 평생 자신을 위하여 산 적이 없습니다. 특히 3년간 공생애 사역에서는 머리 둘 곳도 없으시면서 약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 권리, 내 자유를 포기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마음으로 가지고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해도 전혀 죄가 안 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고 하였습니다.
원리 원칙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실 이것이 무너지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따라갈 수 없는 원리 원칙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말씀의 진리는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감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깔려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사랑이 함께 가는 진리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말이 옳으냐 틀리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나를 용납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느낌입니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전도하는 사람이 용납하고 있으며 받아주고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 때부터는 그 사람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며, 심령이 설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교인들, 초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안에 양심이 많이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그 양심이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그래서 양심이 반응을 하고 괴로워하고 있으면 일단 일의 진행을 중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죄의식 속에 매여 있으면 진리의 말씀으로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설교를 듣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이 적어서 양심이 불안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소리가 다 옳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양심을 설득해 가면서 함께 가야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다른 형제나 자매의 신앙양심을 위하여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이 아니고 그것이 정말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거침돌이 되지 마시고, 디딤돌이 되십시오. 어찌하든지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세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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