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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4-02 (월) 05: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45    
다 이루었다 (요 19:28-42)
이 세상을 사는 목적, 목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무언가 사는 모습이 다르지요. 그냥 되는대로 막 사는 사람들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 인생살이에 대한 태도나 자세가 어떻게 다른지 말씀을 다 안 드려도 다 아실 것입니다. 물론 목표가 허황된 것이라면 아무리 목표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허무하게 끝을 맺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이 분명했기에 대중의 인기에도, 사적인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목표가 있었기에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30절)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일곱 마디 말씀 중 두 마디가 나타납니다. 28절에 “내가 목마르다”와 30절에 “다 이루었다”입니다. 우선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말씀은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5)라고 메시아의 고통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시는 말씀이며, “목 마르다”라는 주님의 음성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그 입에 대셨다는 29절 말씀은 “저희가 쓸개로 나의 식물을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12)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심하게 목이 탈 때에 받는 고통을 죽음의 고통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런 정도의 고통을 당해본 일이 없지만 당해보신 분들은 지금 십자가 상에서 목이 타는 주님의 고통을 조금 이해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에 물이 없어 목이 타고, 입 천장이 들러붙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 동안 보여주신 기적이 아무 소용이 없어서 원망까지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십자가 상의 주님처럼 피를 쏟으면서 생기는 갈증은 자기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물을 마시고 싶어할 만큼의 극심한 목마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위의 주님의 고통은 진짜 실제로 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사흘 후에 있을 부활의 영광 전에 이런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 믿음 생활이 유유자적(悠悠自適)이, 낭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훗날의 영광을 맛보기 전에 이 땅에서 우리가 실제로 당하는 고통이 있고, 고독이 있고, 쓰라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만나는 사탄, 마귀들의 어떤 도전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전쟁을 겁내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정면승부를 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날에 대한 소망을 자기고 고난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한편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갖 고통 중에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의 택하신 백성, 우리들을 향하여 이 선언을 하시고, 이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어의 뜻은 ‘단번에 완전히 끝내다’ 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 성경에 다섯 군데 쓰였는데, 1) ‘마쳤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마 11:1) 경우입니다. 2) ‘내다’, ‘지불하다’는 의미로,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마 17:24)라고 한 경우입니다. 성전에 세금을 낼 때에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3) ‘필하다’라는 의미로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눅 2:39)라고 한 경우입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예수의 부모가 예루살렘에게 올라가서 모든 결례를 마친 경우를 말합니다. 4) ‘응하다’라는 의미로,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32)는 경우입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성취될 것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그리고 5) 본문의 “다 이루었다”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다 마쳤다’, ‘다 지불되었다’, ‘다 필했다’, ‘다 응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같은 뜻의 한 단어입니다. 즉 이 단어의 의미는 주님의 구원 사역, 구속 성취의 승리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율법 성취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인간이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시면서 다 필했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죄 값을 단번에 지불했다는 선언입니다. 영원히 다 갚아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그 값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또한, 예언 성취의 선언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의 중심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승리 선언은 모든 예언 성취의 선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는 순간 대제사장 외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막아두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습니다(마 27:51). 그 결과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사탄은 완전히 패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기에, 인간들은 죄와 율법에서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게 되어 구원의 새 사람으로 새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도 세상에 오신 목적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6:38).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기도 속에도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요 17:4)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바랍니다’(마 26:39,42)라고 반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께서는 잘 아시는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 우리를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도 주님처럼 분명한 목적을,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는 목적이, 목표가 없는 사람은 나중에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님처럼 사는 목표를 분명히 알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기에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표가 없다면 마칠 일도, 지킬 일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 받게 하신 후에 금방 데려가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가서 할 수 없는 일을 이 땅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할 수 있지만 하늘 나라에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는 죄 짓는 일이며, 또 하나는 전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서는 이 땅에서 죄를 더 지으라고 아직 안 데려가십니까? 입만 열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기 질투하면서 싸우거나, 빈둥빈둥 놀면서 마귀의 놀이개가 되라고 이 땅에 남겨두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어린아이도 알만한 상식입니다.
남겨두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라도,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택자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이 목적을 성취하도록 주신 수단으로서의 우리의 생명입니다. 건강입니다. 시간과 물질, 우리의 가진 모든 것입니다. 이 목적을, 목표를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본문 31절 이하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도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입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 유대인들의 안식일 전날 즉, 유월절 예비일이었는데 그들은 유월절이 되기 전에 시체를 장사 지내야 유월절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31절).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양쪽에 있던 죄수들이었습니다. 군병들이 살펴보니 그 두 사람은 아직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했습니다(31-32절).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33절). 그래서 장사 지낼 때 편하도록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쏟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도 출애굽기 12장 46절, 그리고 민수기 9장 12절에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못하게 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36-3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또다시 증명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에 숨어있던 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릅니다(38절 이하). 이 두 사람은 그 동안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산헤드린 공의회원들로서 드러내고 주님을 따르다간 출회를 당할 것 같아 소극적으로 믿었지만(요 12:42), 막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쳤지만, 이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비싼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아무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때까지는 사람들을 두려워했지만, 실제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주님을 보고는 더 이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순교를 각오한 믿음이었습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으로, 주님의 동역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또한 새 무덤이 중요한 이유는 유대인들의 무덤은 대부분 가족 무덤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시체를 안치합니다. 그래서 그런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혼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 무덤에 예수님 시신 하나만 있었기에 혼동될 수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주님 시신이 부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이, 목표가 확실하고 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동역자가 생깁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도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위하여 애쓰고 살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그 목표에 동참했고 일을 감당했습니다. 뚜렷한 목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희생은 동역자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며 찬양하였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욕망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사이에 그들의 야망이 사라지자 다 돌아서서 주님을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참된 성도라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참으시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면서 숨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참으신 원인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강합니다. 이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이 사랑이 있는 사람은 고통을 당해도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라는 주님의 외침은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사랑을 입었는데, 이 사랑을 받고 사는데, 또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이제는 이 사랑에 온전히 사로잡혀 이 사랑을 하고, 주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을 전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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