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410,043
오늘방문 : 16508
어제방문 : 18435
전체글등록 : 3,877
오늘글등록 : 1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4-16 (월) 07:2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15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 20:19-23)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가 아니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신앙생활이, 예배생활이 형식적이거나 피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의 감격이 사라지고, 예배를 드려도, 찬송과 기도를 하여도, 무슨 봉사를 해도 형식적이, 그저 습관적이 되어갈 때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직분을 맡은 것으로, 교회 생활이 오래 되었다는 연륜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 타락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직분이나 경력으로 따지거나, 오래 믿었다는 경륜으로 따질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감동이 사라지고, 첫사랑이 식어지고, 부활의 소망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큰 위기는 없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그 흥분과 감동이 식어진 후에 다시 밋밋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늘 다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다 함께 모인 날은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이었습니다(19절). 제자들이 다 함께 모인 이유는 예수님의 무덤에 이상이 생겼고,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고, 누가 가져갔다고 이야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보았다고 하니 의아해 하면서도 밤에 모였고, 종교지도자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을 꼭 닫아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오도록 말입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선생님을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혹시 누군가 이야기하여 제자들인 자기들도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하나’는 생각이 들자 무서웠던 것입니다. 12 제자들 가운데 이미 가롯 유다는 죽었고,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24절) 모두 10명의 제자들이 다 불안해 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분명히 문을 꼭 닫고 잠가놓았는데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 그들 가운데서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놀람과 충격 자체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너무 놀라고 무서워하여 유령인줄 알았다고 합니다(눅 24:37).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기에 문을 닫아놓았지만 초자연적으로 그 자리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죽어서 장사 지낸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 주님이 문을 열지도 않고 그들 앞에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니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손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20절). 그 때에야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즉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도 사라집니다. 믿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자 처음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을까요? 이유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결코 평안하지 못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잊고 실망감과 절망감 속에 제자들이 몹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절실하게 평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끝났다’라고 선포하시면서, 오히려 주님의 평강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나 혹은 가족의 질병 문제, 아니면 재정 문제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맡기고 내가 주는 평안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 사람 속에 주님 주시는 평안이 넘치기 됩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평안을 누립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그들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절상)라고 하십니다. 왜 또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하신 말씀은 앞으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이어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하) 하시면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모두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말씀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 죽으실 때에도 다 배신하고 도망하였으며,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이 부활한 것을 증거를 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의 주님께서 만나셔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 사명을 감당할 때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처럼 제자들도 이제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사도의 직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면서 사도의 일을 감당하도록 할 것이니,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직분을 감당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2절)고 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개혁주의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앞으로 오순절에 내릴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해석입니다. 또 하나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 구약 시대에서의 성령 사역처럼 일시적으로나마 성령이 임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랬다가 부활의 주님께서 그 자리를 떠나시면서 성령도 그들에게서 떠났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21장에서 보면 제자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나 잡으려고 하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어떤 해석이든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감정이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과거에만 집착하여 있고, 자기 문제에만 빠져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새 기운으로 그 생각과 감정이 새로워져서 의지적으로 세상에 나아가 특별한 목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새 생명이 넘치는 주님의 호흡으로 성령의 기운을 잠시 맛보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절)라고 하십니다. 사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제자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무조건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사도들의 사역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도들이 사람의 죄를 사해주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으면 모두 죄 사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권이 들어있는 복음을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죄 사함은 그들의 죄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23절의 또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이미 교인들을 치리하고 권징할 때에 주신 말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죄를 짓고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 권징을 하고 벌을 주게 되는데, 그 교인이 죄를 회개하기 전까지 제자들이 그대로 두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면서 놀라운 특권의 말씀과 성령을 주시며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 당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핍박 당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당하여 마음 아파할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이미 16장에서 주님이 오신 까닭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사망의 권세마저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께서는 이미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과 감격이 오늘도 생생하게 여러분 안에 남아 있습니까? 오늘도 주님을 만나고 있으며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성령 충만함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고 아무런 감동과 감격이 없이 형식적으로, 타성적으로, 피상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모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만나주십니다.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불안함과 두려움도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평강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여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신다면 교회 안에서만 그런 은혜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그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살게 됩니다. 정말 우리 주위에는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불안과 초조함으로,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음을 믿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저 세상에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이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휴머니즘의 인도주의,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웰빙이 우선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그런 일은 많이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마 4:19). 영혼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가 구제사업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근본적인 일이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부차적으로 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루지 않고 그저 부수적인 일이 우선이 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평강을 허락하셨다면,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체로 다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약속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을 믿고 그 땅을 차지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약속과 함께 복음을 전할, 말씀을 증거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갖고, 마음의 평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입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과거의 실수나 실패로 인하여 의기소침하셔서 마치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처럼 낙심하면서, ‘난 아무 것도 못해’ ‘내가 무슨 전도를 해’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자아를 내려 놓으십시오. 주님께서 다 용서하시고, 평강으로 채워주셔서 사명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교우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름을 받은 자로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61 수요설교 선택받은 백성들이라면(1) (신 17:1-7) 한태일 목사 2012-05-11 1631
460 주일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1) (엡 6:1-4) 한태일 목사 2012-05-07 1584
459 수요설교 우리 제자들이 받을 축복 (막 10:28-31) 한태일 목사 2012-05-04 1579
458 주일설교 말씀을 따라 살면 기적을 봅니다 (요 21:1-14) 한태일 목사 2012-04-30 1539
457 주일설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요 20:24-31) 한태일 목사 2012-04-23 1713
456 수요설교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신 16:18-22) 한태일 목사 2012-04-19 1607
455 주일설교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 20:19-23) 한태일 목사 2012-04-16 1615
454 주일설교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 (요 20:1-18) 한태일 목사 2012-04-09 1615
453 수요설교 지키시는 하나님 (시 121:1-8) 한태일 목사 2012-04-06 1596
452 주일설교 다 이루었다 (요 19:28-42) 한태일 목사 2012-04-02 1640
451 수요설교 맥추절과 초막절 (신 16:9-17) 한태일 목사 2012-03-30 1663
450 주일설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요 19:17-27) 한태일 목사 2012-03-26 1743
449 주일설교 신앙양심을 따라(요 19:4-16) 한태일 목사 2012-03-19 1550
448 수요설교 유월절을 지키라(신 16:1-8) 한태일 목사 2012-03-16 1656
447 주일설교 채찍질하고 조롱하며 때리더라(요 19:1-3) 한태일 목사 2012-03-12 1707
446 주일설교 오늘날의 빌라도는 (요 18:28-40) 한태일 목사 2012-03-05 1724
1,,,5152535455565758596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