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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9-05 (월) 07:5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585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요 13:36-3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여러 대답들이 나옵니다. ‘예배 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찬양과 기도생활이다, 정성껏 예물을 드리며, 교회에서 여러 봉사를 하는 것이다, 혹은 매일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다 맞는 말씀이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기초적인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어떤 면에서 다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한 마디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물으며,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잘 따라 가려고 하니까 예배도 잘 드리게 되고, 찬양과 기도도 뜨겁게 드리게 되고, 정성껏 예물도 드리며, 여러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을 잘 따라가려니 경건의 시간을 갖게 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마 28:19). 초신자 혹은 교인을 삼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36-37절 말씀에서 따른다고 하는 동사가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이 ‘따른다’ 혹은 ‘따라간다’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의 뜻은 제자로서 스승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가는 제자의 삶, 제자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라가는 종의 삶을 말합니다. 죽는 데에까지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내가 어디로 갈까’만 신경을 쓰지, ‘주님은 어디로 갈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은 자신을 위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찾으시는 분은 주님을 정말 주(主)로, 스승으로 모시고 주님께서 가시는 대로 따라 가고, 하시는 대로 따라 하는 ‘제자’를 찾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런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셨습니다. 그래서 큰 고통 가운데서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중심으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도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설교만을 좋아합니다. 물론 살기 힘들어 하고, 상처 입은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이 다 그런 것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고, 지금도 그 은혜를 받고 있고, 주님 사랑을 체험하고 있다면 힘들고 어려운 자신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주님을 따라 살려고 발버둥치는 삶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고, 가롯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신 후,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신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시몬 베드로가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절)? 그러니까 주님께서 답하시기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보였어야 할 반응은 ‘아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다.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양이지만 나중에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니 소망이 있구나’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한 마디 더하고 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인간적으로 볼 때 참 감동적인 모습입니다. 그 의욕이 좋습니다. 수석 제자답게, 의리의 사나이답게, 자기 기질대로 각오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가기에 아직 준비되지 못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아가 살아있는 자만심(overconfidence) 입니다. 자신감(confidence)은 필요하지만 자만심은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의 실패를 예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그리고 잘 아시는 대로 이 말씀 그대로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는커녕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것도 창피하게 계집종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자만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명석한 머리를 믿는 사람,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믿는 사람, 자신의 부와 건강을 믿는 사람들은, ‘나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어. 나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라며 은근히 자만심을 갖습니다. 시험에 빠져 실패할 사람들입니다. 결코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사람들입니다. 자아가 살아있어서, 자신의 기질대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날마다 하면서 사는 그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잘 사용하셨습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자아가 살아있어 자만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기도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앞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시험에 들어 실패할 것 같아서,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옆에서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눅 22:40).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졸았습니다. 그는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곧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이요, 자만심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사탄이 조금만 건드려도 시험에 빠져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조금도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기질대로 늘 다른 사람과 부딪히며 사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그 무엇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자만심이 가득하여 전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기도하지 않고 살지는 않는지. 그저 식사기도나 짧게 하고, 하루에 5분도 기도를 하지 않고 살지는 않는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진솔하게 내 놓고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자아가 깨어져 기질이 죽고, 자만심을 버리며 낮아지면서 기도하고 사시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의 사도 베드로 아닙니까? 36절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그는 지금은 자아가 살아있고,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기에 안되지만 나중에 자아가 깨어지고 난 후에는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아가 깨어지는 과정을 처참하게 겪게 됩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 대제사장의 법정 뜰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할 때에 닭이 울자 주님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을 하게 됩니다(눅 22:62).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도 모든 것 다 잊고 다시 생업을 위하여 고기나 잡으려고 어부로 돌아갑니다. 이제는 자아도, 자만심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이 철저하게 부서졌습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밤새껏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해 주시고(21장),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절, 16절, 17절)?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자아가 부서지기 전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러면서 주님이 무슨 메시아라고 하십니까?’라고 기질대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죽었기에, “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이후에 큰 은혜를 받고 겸손히 주님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고, 자만심이 가득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은혜는 내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나도 넘어질 수 있구나, 나도 시험에 빠질 수 있음을 인정하며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간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고집하고 자아가 살아 있어 자만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라도 부수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을 참 제자를 삼아 주님을 따라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쓰시기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자아가 깨어져서 겸손해지는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건을 통해서라도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냥 고통을 당하면서 한탄하거나 신세타령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연단의 시기가 왔을까 영적으로 지혜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왜 자녀된 우리를 아버지께서 아무 목적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 빠뜨리겠습니까? 그 선하신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아가 부서져야 합니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고, 또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명예를 얻고, 돈을 많이 벌어 재산을 모으고, 자녀들을 세상적으로 잘 키워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 놓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건강을 생각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나 어떻게 하면 노년에 고생하지 않고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게 살까 궁리하며 대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할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은 이 세상 영광에 대하여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으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을 하며 살게 될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잠시 편하게 사는 것이나, 남보다 앞서는 것이나 재물을 쌓아놓는 일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미래의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삽니다. 우리 주님도 그 소망을 붙들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을 바라보며 잘 따라갈 수 있기 바랍니다. 아 멘!
어쩌면 우리 가운데 아직 자아가 살아있고, 자만하여 주님께서 ‘아직 너는 안돼’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자아가 깨어지고, 겸손하게 하신 ‘후에는’ 반드시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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