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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10-10 (월) 09:4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84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요 15:1-8)
포도 농사를 하는 농부가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으면 당연히 많은 좋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 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시 80:8)라고 하였습니다. 팔레스틴 땅에서는 포도농사가 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그 백성들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포도나무는 아시다시피 그 나무 자체로는 별로 볼품이, 쓸모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집을 짓는 재목으로 사용하려고 심는 것이 아니라, 그 풍성한 열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먹는 기쁨을 주기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외모는 볼품이 없어도 그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하고, 열매가 신선하고 맛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씩이나 과실을 더 많이 맺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절, 5절, 8절). 16절에도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고 있는가에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잊으셔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실을 많이 맺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하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나옵니다. 귀한 포도 열매를 맺을 줄 알았는데, 불순종함으로 이방 포도나무와 나름이 없는 악한 가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며 자신은 포도나무인데,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1절). 다른 포도나무와 자신을 차별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완전한 나무가 아닌 완전한 나무, 가짜가 아닌 진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하셨는데, 어느 날부터 이 포도나무가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포도나무를 다 찍어 버리시고, 이제 예수님께서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오셔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는 자들이 맺는 과실, 열매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곳곳에서 전도의 열매를 과실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말하기도 합니다(갈 5:22-23). 또는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의 삶을 가리켜 열매라고 합니다(히 13:15). 즉 믿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과 주님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 자체를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5년, 10년, 20년을 해도 주위 사람들의 눈에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 자식들의 눈에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부모, 교회 생활은 오래되어서 안수집사, 권사, 장로가 되어도 배우자나 주위 이웃 사람들에게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며 슬퍼하실까요? 많은 열매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잎만 무성하다가 마는 가지라면, 아니면 부실하여 기껏해야 하나 둘 열리다가 말아버리는 가지라면 농부가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열매를 잘 맺고 있습니까? 많이 맺고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2절에는 농부 하나님의 포도농사 짓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많이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전지(剪枝, pruning), 즉 가지를 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제해 버리신다고 하는 말씀의 해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사람인데도 전혀 마음에 변화가 없는 사람,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에게 속하였고, 제자라고 말하지만 열매가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가 싶어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열매가 없어도 기다리십니다. 언젠가는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삶으로 열매를 맺겠지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싹조차 보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잘라버리고 맙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되어 버립니다. 즉 신자에게 사망 선고가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고전 3:15).
또 다른 해석은 이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전혀 열매가 없기에 죽은 가지로 생각하고 잘라 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6절에서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으로 떨어져 나가 말라 버린 가지로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지옥의 심판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처럼 말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포도나무 가지라는 뜻이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해석으로 기우는 성경학자들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어떤 해석도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별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초점은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제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두면 건강한 가지도 영향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다른 가지들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가지치기는 우리가 개인적인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쓸데없는 가지를 쳐 주어야 합니다. 잘라내어 버려야 합니다.

농부 하나님의 포도농사 짓는 방법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실을 맺기는 맺는데 많이 맺지 못하는 과실들을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11제자들은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13장에서 온 몸을 씻겨 달라는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을 했으니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깨끗하게 하였다고 하십니까?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금방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깨끗하도록, 정결하도록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구약 성경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때로는 책망하십니다. 잘못된 것을 수정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위로하시기도 합니다. 전에 깨닫지 못한 비밀스러운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심령에 부흥을 가져다 줍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그래서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겉이 깨끗해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이 깨끗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종종 ‘겉만 깨끗한 대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접, 즉 그릇 안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 들어 있는데 겉만 깨끗하게 닦는다고 그릇이 깨끗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깨끗해지는 것은 속에 담기는 것이 달라져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담으면 더러운 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면,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정결하게 함으로 아무리 겉이 볼품이 없는 나무 그릇이나 질 그릇이라도 가장 고상한 그릇이 됩니다. 주인이 자주 쓰는 그릇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최고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의 복음을, 말씀을 “질 그릇 속에 담긴 보배”라고 했습니다(고후 4:7).

오늘 본문에서 눈 여겨 볼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과실을 원하시면서도 과실을 맺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명령하신 것은 “내 안에 거하라”(4절), 그리고 “구하라”(7절)입니다. 즉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내듯이 주님 안에 거하면서 간구하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열린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서 영양분과 수분을 받아먹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때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도 열매를 맺기 위하여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주님에게 붙어있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만 15장 1절에서 10절까지 10번을 강조하여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가지가 나무로부터 영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이듯이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진액을 예수님으로부터만 빨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양다리를 걸치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만 모든 것을 다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능력만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붙어있으면 강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전투는 철저하게 주님에게 붙어있느냐 아니면 자꾸 붙어있지 못하도록 하는 악한 세력에 지느냐에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에게 붙어있지 않고 떠나면 무능력한 자가 됩니다(5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를 떠난 가지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6절).
그래서 이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의 위치가 어딘지, 그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자들입니다. 철저하게 주님에게 의존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을 꼭 붙들고 있으면서,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하십니다(7절).
여기 ‘무엇이든지’가 우리 마음의 소원대로, 욕심대로 구하는 ‘무엇이든지’가 아닙니다. 주님에게 꼭 붙어있으면서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 그렇게 간구할 수 없지요.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삶에 열매가 많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나 주님을 닮는 인격으로 주위에 맛을 내야, 향기를 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바램은 늘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열매를 맺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 주님에게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뿌리를 깊게 박고 있어야 합니다. 한시도 떠나면 안됩니다. 주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에게 붙어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참 제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 문제가 생기고, 고난이 오고, 환난이 닥쳐도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더 붙어있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리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 속성상 외면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을 이기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심판 대신에 축복을 하셨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이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때에 자기 수명이 15년 연장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개혁자 요시야 왕이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때에 유다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고 부흥을 체험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앞서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주님께 붙어있으면서 말씀 안에 거하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몇 몇 여인들이 울며 따르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6:28)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문맥은 이제 예수님께서 몇 시간 안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임을 당하시는 상황입니다. 어느 다락방에서 11제자들을 남겨 놓고 이제 곧 떠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꼭 붙들며, 우리 안에 말씀이 거하게 하면서 이런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포도나무를 떠난 마른 가지들을 놓고 울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었다면 부모의 눈물의 기도가 말라서 그렇습니다. 자녀 문제를 놓고 눈물의 기도가 없이 그저 화만 내면서 자녀들에게 욕하지는 않습니까? 탕자 어거스틴을 키웠던 어머니 모니카에게 교부 암브로시우스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키운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권면을 듣고 모니카가 정말 눈물로 아들을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교회사에 우뚝 남는 성자 어거스틴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교회를 놓고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우리 교회가 주님을 꼭 붙잡고 말씀 안에만 있으면 많은 열매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함께 하면 말입니다.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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