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44,332
오늘방문 : 16893
어제방문 : 10789
전체글등록 : 3,867
오늘글등록 : 1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9-20 (화) 04:2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98    
더 큰 일도 하리라(요 14:12-14)
3년이 넘는 시간을 동거동락하며 주님만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이 주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근심이 가득하여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으며 근심을 떨쳐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힘들어도 미래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이겨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도 약속한 사람 나름입니다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주권자이신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니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부터 16장까지 그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진실로(amen) 진실로(amen)”라고 반복하시면서 강조하십니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고 나면 제자들이 주님 하시던 일을 하게 되는데,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하시던 일이 병을 고치고, 물 위를 걸어가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는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초대교회 시절에 사도들이 기적을 행한 적은 있습니다(행 5:12-16). 그러나 그런 기적들을 염두에 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은 주님이 행한 것보다 훨씬 작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 큰 것을 하게 된다는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영적인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을 말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뜻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음과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그들이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주님과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신 사역을 말합니다. 물론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 승천의 일들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주님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제자들은 다만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 고유한 사역을 전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일을 제자들이 하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팔레스틴을 벗어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으나,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비록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더라도 소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아니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 주님의 수많은 제자들이 땅 끝까지 그 사역을 감당했고, 지금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예언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실한 제자들이 능력을 힘입고 아무리 핍박이 있어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일보다 비교가 안 되는 큰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제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을 믿는 자입니다. 헬라어 원어의 더 정확한 우리 말 번역은 ‘누구든지 주님을 믿는 자’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제자입니다. 즉 만약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여러분 모두도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되는데,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 염려 때문에 방황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일 때문에 낙심하고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힘 없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하라고, 아니 더 큰 일을 감당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상수훈 설교에서(마 6장) 먹는 것, 마실 것, 입는 것 그런 것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염려는 다 이방인들, 즉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더 큰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다는 비전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주님께서 하신 일과 더 큰 일이 곧 그의 나라와 의를 뜻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일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사는 일에, 살아 남기 위하여 발버둥치기보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 그 주님의 일, 아니 더 큰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이런 고백이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 믿기 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옛 사람이 죽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태어난 우리는 ‘나를 위하여’사는 삶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주님의 일을 위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주님이 하신 일을 위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죽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도, 사업체도, 가정생활도 모두 주님의 구속역사의 성취를 위한 목적 있는 수단(instruments)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말씀이 듣기가 좀 힘들고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나를 위하여’는 완전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주를 위하여’라는 고백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목적이 분명하고 뚜렷한 사람은 웬만한 근심, 걱정거리가 생겨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이겨냅니다. 소망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한 아주 중요한 도구(tool)를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3-14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들의 모든 필요는 주님께 직접 요구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 곁을 떠나고 나면 그들의 필요는 어떻게 채워질까 염려하는 그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이 후로는 하늘에서부터 그들의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기도해야 채워지는데, 13-14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아니 15장 16절 하반절에서도,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고, 16장 23하-24절에서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한 것을 내 이름으로 주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또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못 오해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마치는 것이 어떤 기도든지 여러분들이 그저 습관적으로, 아무 의미 없이 맨 끝에 부치는 말은 아닙니다. 또한 무슨 마술 하는 사람의 도깨비 방망이처럼 어떤 기도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주문도 아닙니다. 그 의미를 잘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시는 분,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고백입니다(히 4:15-16).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의 나라와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그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의 일을 위하여, 더 큰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무엇을 구하든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이면 시행하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셋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13절에서도 기도 응답하시는 이유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주님께서도 바라시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주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내 자신의 영광이 되는 것인지 분별해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잘 모를 때에는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해내면서 무엇이든지 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도 응답이 없어도 섭섭해 하거나, 원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중심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면 분명히 시행하신다고 하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분들을 볼 때에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사실 믿는 사람에게 기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일을 아주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주위 사람들을 인식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사람들에게 하는 기도가 되면 그것은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수많은 잡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에 못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눈 뜨고 기도하셔도 됩니다. 사실 눈을 감는 이유는 보이는 것 때문에 잡생각이 들까봐 눈을 감는데, 반대로 오히려 눈을 감기만 하면 그렇다면 눈뜨고 기도해야지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하시면 됩니다. 옆에 있는 친구들과는 수다를 떨어가며 대화를 시작하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후딱 지나가는데,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하면 5분도 안되어 할 말이 없어지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다떨 수 있는 친구보다 관계가 훨씬 먼 것입니다. 믿음이 적어서 그럴 수도 있고, 영적으로 바로 서 있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양육이,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도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이 될만한 기도를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여야 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한 마디로 주님의 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더 큰 일을 감당하도록 새 생명을 주시고, 다른 여러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 그 비전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필요도 채워주십니다. 어떤 능력도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이런 약속들이 우리의 소망을 더욱 확실히 해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 무슨 일 때문에 근심, 걱정이 찾아오더라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하신 또 다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주를 위함이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어떤 근심, 걱정도 해결해 주셔서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야’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입술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부르실 그 날까지 더 큰 일들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26 주일설교 주님의 기도(3) - 믿는 자들을 위하여 - 한태일 목사 2011-12-12 1900
425 수요설교 하나님이 정하신 십일조(신 14:22-29) 한태일 목사 2011-12-10 1917
424 주일설교 주님의 기도(2) - 남은 제자들을 위하여(요 17:6-19) 한태일 목사 2011-12-05 1909
423 수요설교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한태일 목사 2011-12-02 1592
422 주일설교 주님의 기도(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태일 목사 2011-11-28 1536
421 주일설교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고후12:1-10) 한태일 목사 2011-11-22 1698
420 수요설교 하나님 백성의 표시(신 14:1-21) 한태일 목사 2011-11-18 1572
419 주일설교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25-33) 한태일 목사 2011-11-14 1865
418 주일설교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16-24) 한태일 목사 2011-11-07 1567
417 수요설교 든든히 서가는 교회(행 9:26-31) 한태일 목사 2011-11-04 1734
416 주일설교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요 16:1-15) 한태일 목사 2011-10-31 1571
415 주일설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리라 (요한복음 15:18-27) 관리자 2011-10-24 1615
414 수요설교 가라지를 분별하라(신 13:12-18) 한태일 목사 2011-10-23 1690
413 주일설교 주님의 친구입니까?(요 15:9-17) 한태일 목사 2011-10-17 1750
412 주일설교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요 15:1-8) 한태일 목사 2011-10-10 1785
411 수요설교 참으로 사랑하시기에(나 1:1-8) 한태일 목사 2011-10-07 1629
1,,,6162636465666768697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