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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1-08-29 (월) 08:5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03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요 13:31-35)
유명한 20세기 개혁주의 장로교 목사이며 신학자인 Francis A. Schaeffer가 1970년에 쓴 ‘그리스도인의 표지’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 혹은 배지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 자신을 버리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께서 인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사랑, 주님을 배우고, 닮아서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열매이며, 가장 기초가 되는 열매인 사랑입니다. 입술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순종이 따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1절부터 16장까지 예수님은 11제자에게 고별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지난 3년여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말씀하셨던 많은 가르침들, 약속들, 경고들, 명령들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입니다. 바로 주님의 참된 제자라면 정말 삶에서 나타나야 할 아가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성만찬을 집례하시던 어느 다락방에서 가롯 유다의 배신을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고 하시니,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주려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제 11제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약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1-3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영광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성품이 휘황찬란하게 비취는 것을 뜻합니다.
아니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이제 비참하게 죽게 된 것을 어떻게 영광을 얻었다고 하십니까?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요구가 이루어져서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의 능력, 사탄의 능력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3, 히 2:14). 그래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참으셨고, 다음 날 당할 온갖 수난과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까지도 참으셨습니다. 그것이 영광이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도 영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인정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자신 스스로 우리들의 죄를 인정하고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냥 구원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대신 죄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삼일 만에 죽음에서 살리시고 승천하게 하셔서 자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믿는 우리 모두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엄청난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이시지만,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들이 겪는 해산의 고통이 있은 후에 아기를 낳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33절에 제자들을 “소자들”이라고 부르시면서 아직 잠시 동안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만 곧 그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소자들이라는 말은 어린아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 말입니다. 즉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주님만 의지하고 있는데, 떠나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정말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다음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라는 말씀은 처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레 19:18; 마 22:39) 하신 계명과 비교해 볼 때에 새 계명의 사랑에는 차이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하라 하신 이 계명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계명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계명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표준이 됩니다. ‘내 몸처럼’ 이라는 말씀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의 척도가 됩니다. 그러나 새 계명에는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 표준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즉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입니다.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11명의 제자들은 이 사랑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이전에 13장 앞에 나오는 두 가지 사랑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실제로 먼저 사랑을 실천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이 가르쳐준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요 13:3-17). 그리고 또 한 장면은 자신을 팔아버릴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신사적으로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요 13:21-26).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다 스스로 자기를 버렸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천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해 보면, 그냥 볼 때는 어렴풋한 별도 렌즈를 통해보면 눈 앞에 있는 듯 형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을 용서하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매일 묵상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곳은 없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오늘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기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미 12제자들이 자신을 다 배신할 줄 아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삶을 통하여 드러내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붙잡고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말씀에 순종하리라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대상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처럼 서로 사랑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였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룬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 역시 우리 믿는 사람들의 표지 혹은 배지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달하여, 성경 지식이 많아도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대변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지식도 우리의 표지, 배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이기에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교회에서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전도(선교)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들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전도(선교)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이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외면해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들이 1세기-3세기에 걸쳐 세상을 바꾼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하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행 2:46). 공동체 안에 진정한 사랑의 교제, 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흔히 우리는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삶을 통하여, 생활 속에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물론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 무인도에서 홀로 수양하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듯, 사랑은 마음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마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 보여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정말 사랑이기 위하여서는 밖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이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사랑하겠노라. 내 마음에 가득 하나님 사랑을 채우리라’는 미명 아래 자신 속으로만 침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삶을 통하여 확증됩니다. 삶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는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교회를, 성도를, 이웃을, 구역 식구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가진 평범한 생각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믿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 주기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사랑 자체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데에는 희생이 들지 않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막대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달짝지근한 연애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것 같은 희생임을 압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라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인 방언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그저 소리만 크게 나는 꽹과리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인데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받은 예언하는 능이 있고,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과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사랑과 믿음은 따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을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가페 사랑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 감동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셨다면, 아니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리시면 성령님께서 도우셔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정죄하고, 화를 낼 경우에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반대로 남을 사랑하면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며, 축복하면 성령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차가운 것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시신은 차갑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곧 생명인데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소생하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소생합니다. 그러므로 딱딱해진 마음과 뒤틀린 마음을 경계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마음에 쌓아두지 마십시오. 항상 좋은 쪽으로 마음을 사용하십시오. 내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다만 사랑하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시오. 용납하십시오. 경쟁하거나 싸우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할 대상이지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 맡겨 놓고 내 일은 그저 사랑해주고, 이해해주고, 인내하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 껴안아 주면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스스로 변화를 보일 것입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사랑이 중요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사랑에서 옵니다. 정말 주님 사랑 가지고 사랑하고 사십시오. 적당히 하는 사랑 말고, 잠시 잠깐 사랑하다 중단하지 말고 실컷 사랑하고 사십시오.
LA 에서 목회하시며 영성에 관한 많은 책을 쓰신 강준민 목사는 말하기를, ‘저는 때로는 목회자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에 제게 사랑과 격려를 주기도 하지만, 많은 쓰레기와 인생의 찌꺼기를 부어주고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문제를 던져주고 갑니다. 그럴 때 목사는 쓰레기차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쓰레기를 잘 품었더니 좋은 비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성령의 은혜로 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었더니 제 마음이 옥토가 되어서 풍성한 열매가 가득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결국 쓰레기가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이 옥토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생수가 흐르는 옥토가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만 그렇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며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신 것처럼, 사람들의 쓰레기를 치워줍시다. 쓰레기를 비료 삼아 마음을 옥토로 만들 수 있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우리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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