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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06-14 (월) 22:3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59    
[6/13/10]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요한복음 3:22-36)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그 나라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 분들은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내게는 그런 모습이 조금이라도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목사로서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모습은 없는가 염려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에서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문맥을 살펴보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세례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는 그의 설교를 듣고, 온 유다 나라의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양심이 찔려 거의 다 그에게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마 3:5-6). 이 때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이 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요 3:22, 4:2). 그리하여 세례 요한에게 몰렸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두 사람의 비슷한 사역 때문에 비교하기 시작하다가, 둘 중에 누가 진짜 메시아인가 놓고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한 쪽을 선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께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고, 세례 요한에게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 사이에 결례식, 즉 손 씻는 의식 때문에 논쟁이 있었습니다(25절). 논쟁하던 중에 그 제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유대인이 ‘너희 선생보다 예수가 훨씬 더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지 않느냐’는 식의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찾아와 말한 내용이 26절입니다.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에게만 몰려가는 것을 보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바로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미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에게로 가버렸습니다(1장). 하지만 아직까지 세례 요한의 곁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남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버리니 질투를 느꼈던 것입니다. 한편 지도자의 입장에서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치 경쟁하듯이 질투하는 것을 보는 세례 요한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의 충동과 환경의 변화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어려웠을 텐데, 세례 요한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악한 마귀는 제일 먼저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를 공격하는데 넘어지지 않고 굳건히 믿음을 지키면 우리 주변을 공격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움직이고, 자녀들이나 제자들을 움직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을 움직입니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욥이 마귀의 시험에도 넘어가지 않으니까 그 아내를 부추깁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도 욥과 같이 주변 환경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의 성도들의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주변의 상황 속에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하는 오늘 본문의 말 속에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고 합니다. 이 말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이 높이는 만큼 높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전에도 밝힌바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의 앞에 보내심을 입은 자라고 너희들이 증거해야 한다고 28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량대로, 분수대로 일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넘는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서 얼마든지 세례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주장하면서 인기를 계속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정말 그가 메시아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목소리를 높여 자기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만 주목하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가 어떤 말로 유혹해도 하나님이 서 있으라고 명령한 그 자리에게 한치도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그는 시기, 질투를 하거나, 섭섭해 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외모가 똑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 은사, 역할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대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받은 만큼만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몇 달란트를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를 가졌던 충성스럽게 사용하여 남겼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량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말이 자기 비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위치를, 본분을 제대로 잘 파악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일등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시간, 건강, 힘, 물질 가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넘쳤습니다(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자기의 기쁨을 혼인잔치 집의 신랑 친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신랑측 들러리인 Best Man 입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가 아닙니까? 그 날에는 그 두 사람만 주목하면서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들러리인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표현하면서, 신랑이 기뻐하니 자신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결혼식에서 신랑 친구가 자기 결혼식인 것인 양 주인공처럼 행동하면서 신랑은 팽개쳐놓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잔치를 즐기며 흥청망청 좋아한다면 그 모양이 얼마나 보기 안 좋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내 자신이 아닌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삶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한가지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자처럼 보이는 인생을 산다고 해도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얼굴에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면 됩니다. 여러분에게 들러리의 기쁨, 그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높아져야 하고 자신은 낮아져야 함을 알고 실천했습니다(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은 더 커져야 하겠고, 자신은 더 작아져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즉 세례 요한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 예수님이 영원히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으로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높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자신은 얼마든지 작아지고, 희생할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희생하기를 원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이 구절에는 상당히 단호한 그의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반드시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세례 요한이 그렇게 예수님으로 기뻐하며, 예수님을 그렇게 높이며 살려고 하는지 그 이유가 31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위대함을 너무나 잘 알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만물 위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땅에서 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리를 맨 처음으로 아시는 분입니다.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32절)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계시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한다고 합니다(요 8:26).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로 인(seal)을 쳐 준다고 합니다(33절). 그 인의 내용은 “하나님은 참되시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며 그 모든 것이 믿거나 말거나 사실(fact)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습니다. 34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없이 주셔서 그 능력이 무한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 하나님과도 동등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하였지만(눅 1:15), 그의 능력은 제한적이요 부분적이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 모든 권세를 위임 받았습니다. 35절에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시진 이 세상의 주권자입니다(마 28:18).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축복이 풍성한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진노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서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히 저주하면서 이를 갈면서 처참한 고통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흥미롭게 믿는 것과 순종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에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믿었던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은 참 하나님이시오,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면 구원자이신 예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예수님은 높아지는 일이라면 자신은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요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을 빌려 자기가 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복도 받고, 소원도 성취하고 해서 편하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의 삶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정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온 우주의 주권자로서 모든 만물을 주장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세례 요한처럼 자신이 누구인가를 잘 알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내 자신의 분수를 지키십시오. 그런 여러분을 보고 어떤 사람이 소인이라고 비웃을지 모르나 예수님께서는 큰 사람이라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빛도 없고 이름도 없는 작은 일에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일에 충성하면서, 큰 일에 부름 받은 형제들이나, 자매들을 비판하거나 시기,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잘되고, 남들이 성공하는 모습에 대해 그것을 싫어하는 자신의 죄성과 싸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 경쟁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탄, 마귀의 장난입니다. 비교의식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은 바로 옆 성도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높이고 내가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속에 좌정하신 예수님을 보며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모든 교인이 세례 요한 같은 마음으로, 교회 안에서 예수님만 나타내기를 원하며, 예수님만 높이기를 원하며 자신들은 다 죽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을 지불하고 산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만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분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스타가 없어야 한다고 전병욱 목사님을 이 본문 설교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스타로 여기고, 세우며 섬기는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옆에만 가도 항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며,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는데 어떤 성도님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항상 자기 집 자랑, 자식 자랑,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만을 높이며, 겸손히 우리의 본분을 지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으로만 기뻐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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