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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06-06 (금) 04:5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55    
[6/1/08] 과거를 되돌아보며 현재 어디로
과거를 되돌아보며 현재 어디로 (사도행전 20:13-24)
만남보다 헤어짐이 마음 아픈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헤어지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될만한 것들을 남길 수 있다면 그 헤어짐은 결코 마음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만날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말입니까? 아니 이 세상에서 다시는 못 만날 헤어짐이라면 어떤 간증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라는 말 만으로는 아름다운 생애, 기억될만한 생애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감동을 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헛된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해 보아야 아름다운 삶, 감동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한번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허망하게, 시시하게, 방황하며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그들에게 참 잘 헤어졌다는 그런 말을 들어서 되겠습니까?
그와 반대로 참 아름다운, 은혜로운 생애를 살았기에 헤어짐이 그들에게 진정 감동이 되고, 그의 삶이 오래 기억이 되는 간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며, 사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최선을 다하여 살았던 바울의 간증을 살펴보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에서 집회 중에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 청년을 살리고, 그곳을 떠나 앗소를 거쳐 배를 타고 미들레네와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을 하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지려고 할 때,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를 들르지 않았기에(14-15절) 거기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들려준 고별 간증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30마일 쯤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에베소를 들르지 않은 이유는 거기 많은 성도들이 있기에 일일이 만나서 교제하다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16절).
3년 2개월이 넘게, 그의 전도여행 가운데 가장 오래 사역한 에베소교회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함이 간절하여, 교회 지도자들인 장로들을 초청하여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그들을 향하여 마지막 설교 겸 간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간증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18-21절)!
여기서 바울이 주를 섬길 때의 모습 세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 그리고 ‘당한 시험을 참아낸 것’입니다. ‘겸손’이라 함은 겸비한 마음과 생각으로 내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 영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높은 데 마음이나 생각을 두지 않고, 낮은 데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롬 12:16). 그저 말로만 늘 내가 부족하다고 외치는 모습이 겸손이 아닙니다. 또한 늘 남에게 굽신거리는 비굴한 태도도 겸손이 아닙니다. 내 자아를 부인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늘 남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전부 겸손으로 섬겼다, 혹은 큰, 위대한 겸손으로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또, 여기 ‘눈물’은 원어에 의하면 복수로 쓰였습니다. 즉 바울은 목회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입니다. 이 말이 바울이 쉽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와 같은 감정적으로 연약한 자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나 부족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흘린 눈물이며, 그를 비방하며 핍박하던 자들 때문에 흘린 눈물입니다. 영혼 사랑과 연민의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이 온갖 간교한 말과 행동으로 그를 비방하고 괴롭혔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 모든 시험을 잘 참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인들에게 유익한 가르침을 공적으로, 사적으로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하도록 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을 갖도록’ 권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떠나면 못 볼 사람들에게 바울처럼 이런 간증을 들려줄 수 있어야지, 무슨 돈 번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정치, 사회, 스포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남 예기를 하겠습니까?
바울의 이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 간증입니까? 우리에게도 모든 겸손과 눈물과 당한 시험을 참는 것이 있습니까? 정말 겸비하게 내 권리를 포기하고, 내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십니까? 모든 일에 겸손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또한 영혼들을 사랑하기에 우리의 눈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사십니까? 내 죄를 회개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흘리는 사랑과 열정의 눈물입니다.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영혼들을 불쌍히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참으십니까?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도 잘 참으십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주위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함을 위하여 전하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합니까?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한번 깊게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옆에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의 형제, 자매들이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바울의 간증을 언뜻 잘못 들으면 자기 자랑같이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니까요. 사실 간증이라는 것이 차치 잘못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자랑은 자기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간증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함으로 듣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고, 도전이 됩니다. 듣는 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가 간증입니다. 바울의 간증이 그렇게 에베소교인들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해서 이런 아름다운 간증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 힌트가 22절에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른지 알지 못하노라”고 합니다. 여기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는 말이 ‘자신의 영혼이 성령에 속하여, 성령의 자극을 받아’ 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이, 목적이 분명했다는 뜻입니다. 성령께 속하여, 우리 주 예수께 속하여 그 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왔고, 지금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분의 매임을 받아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교우 여러분!
우리는 늘 과거를 되돌아보며 미래를 향하여 현재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이,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어디로’를 알기 전에 ‘내가 누군가’를 먼저 알아야 어디로 가야 할른지, 어떻게 살아야 할른지 알게 됩니다. 내가 ‘목사’, 혹은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임을 알 때에 어떻게 살아야, 어디로 가는지 알 것이 아닙니까? 내가 ‘남편’ 혹은 ‘아내”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 임을 자각할 때 갈 방향이, 목적이 정해지지 않습니까? 내가 ‘성도’ 임을 분명히 알아야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사는지 결정될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늘 깨닫고,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알고 있었기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3-24절)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이 분명했기에, 비록 결박, 환난, 핍박이 있어도 아니 목숨이 위태로와도 그것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달려왔고, 어떤 위험이 있어도 앞으로도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내가 누군가’를 깨닫고 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조금은 알기에 이렇게 사도 바울처럼 아름다운 간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의 과거를 돌아보시면서, 만약 오늘 우리가 헤어진다면, 다시 못 보게 된다면 어떤 간증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바울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당한 시험을 잘 참아내었다’, ‘사랑하는 늘 당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살았다’ 라고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 말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주위에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산다 해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이,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열심일 뿐입니다. 돈이, 명예가, 이 세상 사랑이 목적지가 된다면 헛된 삶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고백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하면서 세상적인 것들을 넘치도록 누려본 그는 인생의 황혼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바울처럼 아름다운 간증을 남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늘 이 은혜를 기억하면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 여러 가지 시험을 잘 참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질 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성령에 매임을 받아, 주님께 속한 자처럼 살 수 있습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의미있는 삶, 감동을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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