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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6-15 (월) 22:0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74    
[6/14/09]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시편 7:1-11)
때때로 교인들에게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정말 사람들이 무서워집니다!’ 하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비추어 보아도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입니다. 때때로 사람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다 선하지는 않습니다. 선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몹시 무서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이용 당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잠언서에는 사람을 잘 가려서 사귀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주의해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멀리해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잘 분별하여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악한 자들의 예를 곳곳에 들고 있습니다. 패역한 자, 교만한 자, 미련한 자, 게으른 자, 어리석은 자, 말 많은 자, 거짓된 자, 이간하는 자, 궤휼한 자, 시기와 질투가 심한 자 등 그 태도와 행위대로 구분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7편의 표제에 보면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식가욘’의 뜻은 일반적으로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옆에 있는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쓴 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시’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베냐민 지파는 사울 왕의 지파이기에 한통속으로 다윗을 미워하며,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그를 비방하며 욕하고, 사울 왕에게 밀고한 자일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생애는 악한 사람들로부터 피 말리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평생 그 상처가 완전하게 아무는 적이 없도록, 아물 만하면 또 터지고 해서 계속 피를 흘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다윗을 괴롭힌 주변의 악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아마 그 다음이 아들 압살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다윗은 사울 왕에게서 악한 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구시라는 사람과 함께 하는 무리를 가리켜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맹수 사자처럼 사납고 무시무시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잔인해지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혀를 가지고 사람을 죽일 때입니다. 혀 자체는 참으로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이 혀가 얼마나 무서운지, 순식간에 집을 태우는 불과 같다고 합니다. 온 몸을 더럽히며 전 인생을 불사르기도 하는데 지옥 불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 3:6). 또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약 3:8). 마치 칼의 날카로움보다 더 날카롭게 사람의 심장을 찌르기도 합니다. 다윗은 지금 구시한테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저주와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마치 사나운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듯합니다. 사실 사자보다 더 사납지요. 사자는 인격을 헤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짐승이라도 기껏 해봐야 육체에 상처를 주거나 헤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에서 나오는 모함이나 비난, 저주, 욕, 수근거림은 마음 깊은 곳에 쓰라린 상처를 냅니다. 몸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고 치료하면 적당한 시간이 지나 아물게 됩니다. 그러나 말 때문에 깊게 난 상처가 치유되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은 비겁해서 대부분의 경우에 면전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헐뜯고 깎아 내립니다. 이런 무서운 사람들은 잘 가려내어, 가능하면 이런 자들은 멀리 해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 왕과 구시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이 악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였기에 다윗이 죄를 지었다면 왕이 얼마든지 정식 재판에 회부하여 그를 심판하면 되는데, 사울은 재판하지도 않고 여러 번 암살하려고 했고, 도망가는 그를 끝까지 쫓아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국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서 인내했습니까?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였습니다(1절). 그리하여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급하면 아무 곳에나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도가 가장 피하기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7절에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셔서”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께서 자리를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오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윗 편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지금 간섭하실 때이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 왕과 그 무리들을 피하여 숨을 곳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그를 숨겨주거나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께 나아가 주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3-5)! 여기서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라는 말은 ‘악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뜻입니다. 악한 자들은 온갖 허위를 지어내서 성도들에 대하여 악한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다 믿습니다. 악한 자들은 성도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악하게 부풀리거나 아니면 없던 일을 실제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내서 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들의 악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평소에 믿었던 사람인데 배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자기가 성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들을 거짓말로 바꾸어서 치명적인 공격을 합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자기가 절대로 이렇게 쫓길 죄를 짓지 않았으며 지금 악한 자가 왜 이렇게 미워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만약 자신이 그렇게 했다면 심판하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6절) 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뜻입니다. 6절에 “나를 위하여 깨소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니까 깨시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너무나도 다급하기에 예의는 아닌 줄 알면서 자신의 사건을 밤중에라도 예외적으로 심리해 주셔서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진노로 일어나사”란 자초지종을 다 들은 후에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시기 위하여 진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입니다. 성도들은 만약 자기 양심만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나의 무죄함을 변호해 주신다면 이 세상의 어떤 불의의 세력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기도는 들으시지 않지만, 억울한 성도의 기도는 들으십니다. 믿음은 바로 이럴 때에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8-9절)! 즉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재판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는 매 순간 죽음의 고비를 만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죄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만일 하나님께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여기서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은 무엇입니까? 악한 사람들은 양심을 버리고 권력자에게 붙어서 아부하고 아첨하지만 자기는 끝까지 그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미움을 받고 쫓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다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9절). 또한 하나님께서 무한정 악한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는, 적어도 우리는 이웃에게 비난 받을 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도 남을 해치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떳떳한 대인관계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랬기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피하여 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재판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살벌한 경쟁 사회 속에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들이 상대방에게 어떤 해를 전혀 끼치지 않고,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고 완벽한 성도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말을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결국 내가 앞으로 남에게 상처 받을 것에 대한 대가를 미리 지불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성경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벧전 3:10)라고, 시편 34:12-16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구시가 몇 마디의 말로 다윗을 그렇게 괴롭힌 것처럼, 우리도 몇 마디 말로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 사람의 인격을 짓밟아 놓고 태평스럽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자보다 더 무서운 악한 사람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진실을 오해를 하여 스스로 상처를 받는 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재판을, 심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수하고 싶은 생각을,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든지, 구시이든지 직접 복수하려고,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사람을 치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는 생각이 아닙니다. 사탄,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오로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원한과 고통을 토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저 ‘하나님! 저 대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시오’라고 했을 뿐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충분히 원수들을 물리칠 능력이 있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성경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 . .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 19, 2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때가 되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으시고, 우리는 다만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주며 용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오직 하나님만이 항상 우리를 지켜주시는 방패가 됨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0-11절에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요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이 정직한 자’의 의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그런 성도들의 방패가 되어 주셔서 매 순간을 지켜 주십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그의 설교집에서 여기 방패를 방패자로 해석하시면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시면서 방패를 가지고 막아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현대 용어로 이 방패를 레이다로 해석하십니다. 가장 취약한 지점에 레이다를 설치해 놓으셔서 적이 공격하는가 살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좀 지나친 해석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이해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께서 실제로 방패가 되셔서 막아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의 악한 자들로부터 우리를 막아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정말 레이다처럼 천사들을 보내어 미리 사전에 막아주실 수도 있고, 실제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자에게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셔서 지켜 주신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어도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 반대로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 대하여는 매일 분노하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단지 그 악한 자 본인만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면서도 가만히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 데까지 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출애굽기의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이 그러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윗처럼 방패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함으로 참고 인내하셔서, 결국에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만 이 세상 살아갈 동안 그런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라고 부르짖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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