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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0-12 (금) 02:25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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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93    
성도간의 소송(고전 6:1-11)



성도 간의 소송 (고전 6:1-11)
   우리가 사는 미국은 정말 변호사가 많습니다. 거의 모든 일이 변호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집을 사거나, 가게를 살 때에도 필요합니다. 목사도, 사업가도, 건축가도, 의사도, 약사도, 기술자도 종종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워낙 소송(lawsuit)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소송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고소를 당하면 어쩔 수 없어서 당하는 쪽에서도 변호사를 사게 됩니다. 그래서 법정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전혀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옛날에는 법정에 가기 전에 주먹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힘 있는 자가 이겼습니다. 아니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장로들, 즉 집안이나 동네 어른들, 유지들에게 문제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을 존경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른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도 소송을 하여 법정에서 해결하려 합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일이 신문에 기사라도 나면, 성도로서 불신자들에게 얼마나 창피한지 모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성도 간에 소송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끼리 어떤 다툼이 있어서 세상 법정에 그 문제를 가지고 가게 된 일을 듣고서는 그 성도들에게, 아니 교회에 분노하며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절)!
   문맥을 살펴보면 아마도 돈 문제 같은 것으로 어느 성도가 속았다고 생각했는지, 두 성도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소송하여 세상 법정에 간 것이었습니다. 세상 법정이 불공정하게 재판하기 때문에 소송해서 믿지 않는 법관 앞에 간 사실을 걱정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 문제를 어찌하여 교회 안에서 해결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령의 전인 교회라면 교회의 권위에 존중하고 복종해야 할텐데, 성도들이 얼마나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며, 지도자들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법정에 가느냐는 말입니다. 문제를 왜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해야지 왜 세상이 성도를 판단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2절)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 종말이 와서 주님 재림하시면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마 19:28, 계 20:4). 아니 악한 천사들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3절). 그런 성도들이 하물며 세상 일을 판단하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의 일을 판단할, 중재할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꾸짖고 있습니다(4-5절). 교회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고치고, 치유하여 성도들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데, 어찌 경히 여김을 받는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도들을 판단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6절)! 즉, 성도 간에 소송한다는 것이 불가하며, 특히 믿지 않는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지위가 그보다 훨씬 높다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라면 다른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한 형제가 되었음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좀 손해를 볼 생각을 해야 하지 않느냐, 형제를 위하여 불의를 당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리라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7-8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설교에서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돌려대라고 하셨고,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까지 동행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39-41). 어느 정도로 용서하라고 하셨느냐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2). 이런 말씀들이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늘 손해를 보아야 하며, 불의를 당하여, 속으면서, 맞으면서, 용서만 하면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반드시 내 이익만 생각하고 이겨야 하겠다고 발버둥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은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언제나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반드시 이겨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게 되고, 성령이 근심하게 되어서 평안이나 기쁨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은 없습니다. 이기는 것보다 오히려 지는 것이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의 일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손해 보는 편에 서야 합니다. 한 형제이며 자매인데 내 이익을 따져서 되겠습니까? 이기려고 해서 되겠습니까? 사실 교회 안에서 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사람은 가장 천한 사람입니다. 마치 교회가 세상의 법정인양, 논쟁의 영에 사로잡힌 자 같이 회의를 할 때마다 끝까지 따지면서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은 정말 사랑이 없는 자요, 좀 덜 된 사람으로 신앙인격이 부족한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사랑으로 권면하여 온전케 되도록 기다려주며, 비록 잘못을 했어도 자신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 소중한 사람인지 그 자존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어려움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압니다(롬 8:28). 그러므로 성도들은 내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결과가 나타날 것을 믿고 그 일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우리 주님처럼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성도를 소송하는 것을 불의를 행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8절).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못 받을 부도덕한 자들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 법정에 다른 성도를 소송했다고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 당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9-10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탐색하는 자”는 남자가 여자같이 행하며 성을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남색하는 자”는 동성연애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미 5장 10-11절에서도 여기 나오는 대부분의 죄들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죄를 지속적으로 짓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그런 죄들을 지속적으로 짓고 살 수가 없지요.
   마지막으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죄 가운데 살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다 씻어 버렸다는 것은 중생함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라고 말씀하였듯이, 중생은 우리의 죄가 씻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죄된 모습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관계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이란 새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태도와 행동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변화를 받아 겉으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이 믿기 전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완전히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았기에 전혀 의로운 말과 행동을 할, 거룩하게 살 능력이 없었지만, 중생한 후에는 이제 주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의의 종이 되어 살게 된 것입니다(롬 6:6-11).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함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자리로, 새로운 위치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시고,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이 진리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롬 3:26). 우리 성도들을 온 세상에 새 사람이 되었다고, 의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선포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내 자신이 누구냐’ 하는 정체성을 다시 일깨워줌으로, 새 사람으로서 변화된 성품으로 성도들끼리 서로 대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다면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지, 세상 법정에 가서 소송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불신자들 앞에서 판단을 받지 말고, 교회 안에서 은혜로운, 세상 법정보다 훨씬 더 의로운 판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서 서로 싸우면 불신자들 앞에서 교회와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 지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전도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지혜로운 지도자들의 중재를 흔쾌히 받아들여야 해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양보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이 없이 그대로 선포되고, 기도하는 성도들로 기도의 불이 끊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죄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죄를 이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교회 안에 죄가 들어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막는 무엇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역사를 막고, 진정한 회개를 막는 것이 교회 안에 있을 때에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미 주님의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얼마 있지 않아 세상에 삼켜지게 됩니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되게 합시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기도의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합시다. 모일 때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교회다운 참된 교회가 되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이며, 참된 부흥을 맛보는 첩경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지 말고, 서로에게 어떤 관계로 맺어졌는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고귀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희생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용서하고 용납하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들은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개인적으로도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피조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깁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죄 가운데 거하던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점점 거룩해져 가는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이 세상의 법이나 도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의 심령에 있는 신앙양심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자기 양심을 속이고 산다면 교회는 물론이고, 이 사회조차 법이나 도덕으로도 유지가 안 됩니다. 먼저 내 안의 잘못된 것을 잘못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양심선언이 있으면 교회도 살고, 이 사회도 죄악으로부터 지켜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신앙양심을 지켜가며, 주님의 몸된 교회의 권위를 세워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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