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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2-24 (월) 22:1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77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려진 삶(고후 5:11-17)


참된 영적 지도자들이 효과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려면 몇 가지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집중력이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며, 의사소통을 잘해야 합니다. 웬만해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강함이 있어야 하며, 모험을 할 줄 알고,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질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성, 도덕성, 투명성 입니다. 위선적이지 않고, 말과 행실이 하나인 것입니다. 영어로 integrity 라고 하는데, 이 단어를 우리 말 성경에서는 정직(시 15:2; 잠 2:7; 11:3), 성실(시 7:8; 25:21; 78:72), 완전함(시 26:1,11; 41:12; 101:2)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자질들이 많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들에서 감독(목사 혹은 장로), 혹은 집사의 자격을 이야기할 때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삶(딤전 3:2; 딛 1:7-6),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자(딤전 3:8), 혹은 깨끗한 양심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를 지도자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런 삶을 자신이 살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11절하)고 합니다. 자신이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알려진 삶을 살았기에, 고린도교인들의 양심에 비추어도 그렇게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정직하고 투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He was a man of integrity!
   요즘 우리 주위에 있는 영적 지도자들이 그런 삶을 살지 않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교회를 어렵게 하고, 더 나아가 전도의 문을 막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만 그렇습니까? 지도자들이야 많은 사람들 앞에 잘 드러나서 쉽게 욕을 먹습니다만, 사람들 앞에 잘 드러나지 않는 평신도들은 그 주위에 바라보는 사람들이 전혀 없습니까? 그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이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고 있지 않을까요? 홀로 있을 때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말씀처럼(5:1-10), 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늘 믿음으로 행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다 드러나도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를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 자들이 있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과거 믿기 전의 모습만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나 거짓 선지자들과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회의 영적지도자들이 이렇게 공격을 받게 되면 교회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교회는 바울 편과 그 반대편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과 그 동역자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알려진 깨끗하고 정직한 삶일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11절상)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권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늘 그 앞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 분을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경외하기에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삶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 져도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교회와 참된 교인들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12절)고 하였습니다. 이미 3장 1절에서도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교인들이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조금이라도 안다고 하면, 그런 훌륭한 지도자들을 자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달리 교회 안에 겉과 속이 다른, 마음과 외모가 다른 자들을 보고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들은 정직하고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으면서 일구이언하고 겉 모습을 자랑하는 자들을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을 믿지 말고 자신과 동역자들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진실로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13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미쳤다”라는 단어는 ‘종교적인 무아경지에 이르렀다’는 뜻도 되는데, 일반적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아마 교인들 가운데 바울이 정신이 나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말입니다. 유대주의자들 가운데 옛날 바울의 모습만 생각하고 그가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자 충격을 받고 미쳤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니면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약 그들 눈에 자신이 미쳤다고 보인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온전히 진리의 말씀만 전하는 일에 미쳤다고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족 일은 돌보지 않고 말씀을 전하자, 집안 가족들이 정신이 나갔다고 잡으러 온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는 사람이기에 정직하고 투명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 앞에 삶 전체가 드러나는 삶이었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에, 강하게 붙드시기에 우리도 따라서 육신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셨기에, 모든 믿는 자들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육신을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주님이 사는 것처럼 산다는 말입니다(갈 2:20). 그러므로 그 큰 사랑을 경험한 자들은 그 사랑 때문에 함부로 살지 못합니다. 아니 그 사랑에 감격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삽니다. 내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삽니다. 시기와 질투와 같은 죄성이 나를 주장하려고 할 때에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다 내려놓습니다. 이 세상이 나를 아무리 힘들게 하여도 그 사랑을 기억하고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나를 지배한다면, 강권한다면 정직하고 투명한,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 때문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15절)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 위하여 사는 사람이 거짓과 위선으로 살겠습니까? 죄성을 따라 시기, 질투하며 내 욕망을 따라 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남은 삶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 값을 지불하고, 그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순간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여러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옛 모습만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말해 주어야 합니다.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옛 모습만 알던 사람들은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유대주의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절)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정직하고 투명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새 사람으로 바뀌어야 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7절)! 자신을 비롯해서 변화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한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독생자의 피로 새로 창조된 백성들입니다. 비록 아직 죄성이 남아 있어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는 계속 변화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마귀의 자녀로 있다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놀라운 축복을 체험했기에, 주위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찾아와 주셨던 주님의 사랑으로,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기 원합니다. 전도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사랑이 있기에 자신이 정직하고 투명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도가 되지 않으니까요.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이 바울과 그 동역자들처럼 정직하고 투명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 지도자들은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누가 우리를 비방한다면 바울처럼 자신을 변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지도자들만 그렇게 살아야 하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앞에 대 놓고는 욕하지 않더라도 뒤에서 욕하지 않을까요? 그럼 누가 욕먹는 것인가요? 우리 예수님 아닌가요?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레 11:44)고 명령하셨습니다. 정말 구별된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돈 문제에, 이성과의 문제가 전혀 없습니까? 깨끗합니까? 하신 말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까? 말을 바꾸거나 다른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지 않습니까?
    정말 새로운 피조물이 되셨다면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적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함으로 교회에 어려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온전히 헌신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자신과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전체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큰 사랑이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붙잡혀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자비와 긍휼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부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여러분들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축복의 삶이 되도록 간절히 소망하여야 합니다. 완전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여러분의 마음을, 생각을,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들을 품고 산다면, 늘 하나님 앞에 내 삶이 알려져도 괜찮은, 그대로 다 벌거벗겨 져도 괜찮은 투명한, 정직한 삶이 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동안 간증이 될 것입니다. 훗날 주님 앞에 설 때에 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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