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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9-16 (월) 08:3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44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일들(고전 16:15-24)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결론적인 권면을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절)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 몇 몇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교회 안에서의 교제에 있어야 할 사랑에 대하여, 그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일들에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 왔었습니다. 정말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하였고,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마지막절에서도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24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고린도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었기에 서신을 마감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일 중 첫 번째는, 전도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15절상)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아가야 지역, 즉 고린도와 아덴이 있는 현재 그리스 반도에서 전도하였는데 스데바나가 그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믿는 자가 되어 그 온 집이 다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예수를 믿게 되니까 그 가족들과 하인들까지 한꺼번에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권속들을 첫 열매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전도의 일을 사랑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사랑을 가지고 이웃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면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입으로, 행실로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고, 우리는 다만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전할 뿐입니다.
   둘째는,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15절하)고 하였습니다. 스데바나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권속들이 다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하여 섬긴 일을 고린도교인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섬긴다는 단어는 종처럼 아래에서 스스로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집사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한 것처럼(막 10:45), 바울도 그렇게 섬겼는데 우리도 그렇게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섬기는 것들 것 잊지 않으시고 다 헤아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고 하였습니다.
   여기 섬기기로 ‘작정하였다’는 단어가 중요한데, 그 원어를 살펴보니 ‘헌신되었다(devoted)’, 혹은 ‘중독되었다(addicted)’ 라는 뜻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헌신되었다, 중독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중독되었다는 말이 좋지 않게만 쓰여져서 나쁘게 들리지만, 좋은 일에 중독이 되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스러운 것입니다. 한 시간도 섬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좋은 습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이 되어 있고, 중독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들이 모두 섬기는 일에 헌신이, 중독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들에게 사랑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16절)고 하였습니다. 스데바나와 같은 자들, 그리고 함께 동역하면서 수고하는 분들에게 사랑으로 복종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 ‘복종한다’라는 단어는 마치 종이 주인 ‘아래서 듣는다, 시키는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고 하였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빌 2:3). 내가 더 나으니까 위에서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낫다고 여기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아래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말입니다.
   넷째는, 사랑으로 사귀며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17절)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교제에서 나타나는 것은 나눔입니다.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자기를 찾아와 교제하게 됨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린도교인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고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귀는 것과 나누면서 사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나누지도 않고 말로만 사람 사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 이기적인 사귐입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는 교제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누라고 맡겨주신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의 사귐을 갖습니다. 그런 분들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천하는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잠 25:25). 여러분을 만나 사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울과 고린도교인들에게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18절상) 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는, 사랑으로 다른 성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18절하)고 하였습니다. 여기 ‘알아 주라(acknowledge)’는 단어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무슨 일에 대하여 인정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인정해 주려면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동역자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보내면서 빌립보교인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 2:29)고 하였습니다. 여기 존귀히 여기라는 말이 알아 주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고린도교인들은 파당으로 인한 내분이나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 혹은 은사 문제 등으로 상당히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민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중문화권에서 살면서 생존해야 하는 부담감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게 되기 때문에 자존감이, 자긍심이 매우 약합니다. 자격지심으로 인하여 공연히 오해를 하며 삽니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조차 인정하며 알아 주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룻기서에 보면 룻은 모압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는데,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와서 다른 유대인들은 이방 여인이 개종해서 왔다고 해도 반갑게 받아주지 않았지만, 보아스가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고 받아주어서 결국 예수님의 조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은 다른 성도들을 존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으로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합니까? 아니면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로 여기기는커녕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냉냉하게 대합니까?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만약 성도를 그렇게 대한다면 곧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제발 말 조심을 하시고, 한 분 한 분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여러분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여러분들을 묶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 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는,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19절-20절상)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문안한다는 말은 진심이 담긴 진솔한 인사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집에서 사랑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살았던 유대 그리스도 부부이지만, 로마 Claudius 황제에 의하여 주후 49년에 추방되었습니다(행 18:2-3). 그 후 고린도에 정착했을 때 바울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함께 에베소 선교여행을 했으며, 그곳에서 아볼로를 만나 그에게 그리스도의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행 18:24-26). 그리고 바울이 아시아 지방(현재 터키)의 교회를 방문할 때에도 교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각 가정이 교회인 적이 많았습니다. 자기 집을 열어 성도들을 초청하여 대접을 하고,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전통을 이어 받아 오늘날 우리가 구역모임을 각 가정에서 돌아가면서 드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성도들 대접하기를 좋아합니까? 하나님 사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한 그릇을 대접해도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35-4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아십니까(눅 10:30-35)?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선한 손길을 내밀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일곱번째는, 사랑으로 호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20절하)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거룩하게’거 부사로 되어있지만, 원어에 의하면 입맞춤을 수식하는 형용사로서 거룩한 입맞춤(holy kiss)를 뜻합니다. 물론 당시의 인사 문화가 입맞춤이었습니다. 요즘도 유럽 사람들은 반가운 만남의 인사가 서로 양쪽 볼에 입맞춤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가볍게 서로 hug 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고 합니다. 무슨 이성의 감정으로 입맞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입맞춤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한 형제, 자매로서의 우애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에 살면서 미국 문화를 따라 hug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악수를 하지요. 근데 정말 악수를 해 보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혀 반갑지도 않을 때에는 차가운 악수를 하지요. 형식적인 인사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 부분이 약해집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면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니 말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서로 거룩한 사랑의 표현을 하고 지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우리는 다 속으로는 혹은 말로는 사랑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며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에 그렇게 사랑으로 행한다고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사랑으로 전도하고,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며, 사랑으로 서로 복종하며, 사랑으로 사귀며 나누고, 사랑으로 존중히 여기며 알아 주고, 사랑으로 대접하고, 사랑으로 호의를 표현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22절)고 하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경고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주가 임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요일 4:20)?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믿기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새로운 비전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행동들을 오늘 말씀드렸습니다. 전도와 섬김, 서로 복종하며, 나누고, 존중히 여기며, 대접하고, 호의를 표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제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고치십시오. 노력하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마치면서 제가 여러분들을 축복하면서 할 수 있는 말씀을 바로 맨 마지막 두 구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23-24절)!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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