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452,084
오늘방문 : 28508
어제방문 : 29615
전체글등록 : 3,877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10-14 (월) 04: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52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2) (고후 1:23-2:4)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 혹은 교회를 싫어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큰 손해를 보거나, 좋지 않은 일을 당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전에 교회를 좀 다니다가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이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인격 속에 바울처럼 주님을 닮는 인격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다면 우리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부단히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께서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비방하고 불신하는 고린도교인 몇 몇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자,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강하게 역설하면서 설명했습니다(15-22절). 자신은 한번 마음을 주었으면 끝까지 변치 않는 충성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정직하고 신실하여 누구나 자신을 믿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믿음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있는 자들, 즉 누가 보더라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지한 믿음의 표시가 있는 것처럼 자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방문 계획이 바뀐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데, 계속되는 그의 변호를 살펴보면서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있어야 할 인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마음과 정직하고 신실함, 믿음의 진정성 외에 그는 다른 성도들을 배려하며 아끼는 자였습니다. 즉 다른 성도들의 상태에 민감한 자였습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주는 겸손한 자였습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오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3-24절)고 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바울의 증인이신데, 에베소에서 바로 고린도로 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아끼고 배려해서라는 말입니다. 사실 바로 가서 징계를 받아야 할 교인들을 자신이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직접 치리하려고 했다면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서도 믿음이 확실한 자들이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징계를 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기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이 근심하면서 고린도를 방문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2:1) 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 동안 설교를 통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나 자신보다 남을 위하여 사는 것임을 수 차례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respect),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내 자존심, 내 권리만을 주장하며 말하고 행동한다면 너무 우리 주님의 마음, 인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성도들, 형제, 자매들이라면 더욱 존중하며 아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배려하고 돌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형제들아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데살전 5:14)고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정결하게 살고자 애를 썼던 사람이기에, 성도의 순결, 더 나아가 교회가 순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2:2-3)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고린도 방문을 늦춘 것이 징계를 받아야 할 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가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7장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 징계를 받아야 할 교인들이 사도가 직접 치리하려고 위협할 때에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그 사람만 자신을 기쁘게 할 뿐이지 교회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교회의 분위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물론 바울은 그의 편지를 받고서 그들이 즉시 회개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기뻐해야 할 교회가 근심에 쌓일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서 자신이 나중에 방문할 때에 기쁨을 주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달리 교인들이, 교회가 죄를 버리고 거룩함, 순결함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저 교회는 하나라는 대 전제 아래 교회 안의 회개하지 않은 죄를 그냥 묵인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리를 지키며, 거룩함을 유지하기 보다 연합을 강조하면서 죄를 묵인하고, 어찌하든지 사람이 많아야 부흥하는 교회가 아니냐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겠습니까? 큰 그릇에 담겨진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고 하더라도 작은 오물이 들어가면 전체가 더러운 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룩이 번져서 다 더럽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6-17; 레 11:44 인용)고 경고하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는데, 신부가 순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교회는 주님의 몸인데, 주님의 몸을 더럽혀서 되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에게는 넘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2:4)고 하였습니다. 즉 고린도교회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이 진짜 사랑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큰 환난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인해 눈물로 쓴 편지였다는 것입니다. 단지 무슨 정에 이끌리는 감상주의(sentimentalism)는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고 하였습니다. 통책이라는 말은 마음 아픈 책망을, 상처를 뜻합니다. 비록 마음이 아파도 사랑의 책망은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래서 충신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책망이지, 잘못이 있음을 알면서도 늘 달콤한 말을 하며 입맞춤을 한다면 간신들이 하는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런 진정한 친구의 책망이 참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사랑의 책망을 받을 수 있는 신뢰가 서로 있어야 하겠지요. 서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경청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지난 주일부터 말씀드린 바울의 성품들은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씩 떨어져서 나타나는 성품들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들에게는 이런 참 사랑이 있습니까? 참 친구가 하는 가슴 아픈 조언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고, 넘치는 사랑으로 그런 조언을 아낌없이 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랑을 애타게 찾고 있고, 이런 진정한 친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정말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있어야 할 인격, 나타나야 할 성품들을 바울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바울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믿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변함없이 마음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충성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성령께서 인을 친 사람으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보장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오늘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을,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교우들을 존중하고, 아끼며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낮은 자세로 대했습니다. 또한 거룩한 삶,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 불신자들과는 달라야 하는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신부로서 순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교회는 세상에 있는 무슨 한인회나 동창회, 향우회 모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가 어떤 죄를 묵인하여서 그 죄가 번져 부패하고 타락하여 간다면 이미 교회라고 할 수 없겠지요.
   아니 무엇보다도 넘치는 참 사랑의 바울이었습니다. 참 사랑이 있었기에 눈물의 권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뼈 아픈 고통이 있어도 그 영혼을 사랑한다면 지혜롭게 권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원래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정말 때로 사람들 때문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권고를 해도 듣지를 않을 때 ‘나는 할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집을 나가겠다는 부인이 있습니다. 툭하면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도 있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톡톡 쏘아대며 반항하는 사춘기 자녀들이 있습니다. 선의로 이야기를 하면 악의로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해답은 무엇입니까? 헤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을 품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붓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넘치는 사랑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과소평가하는 것 결코 아닙니다. 때로 얼마나 피곤한지, 받은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화도 많이 나고, 실망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한 약속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한 서약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 약속을 지키려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한번 더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고, 높고, 깊고, 넓은 무한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실 수 있게 됩니다. 사랑스럽지도 않은 상대를 사랑해보면, 자꾸 미워지는 그 사람을 억지로라도 사랑해보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가슴 속 깊이 느껴질 것입니다. 집을 뛰쳐 나가려는 아내를 붙잡을 때, 욕하며 주먹질하려는 남편에게 억지로라도 더 좋은 반찬을 만들며 잘해줄 때,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고서 집 나간 자식을 위해 이미 용서를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문을 잠그지 않을 때, 자꾸 못되게 굴며 부당하게 대하려는 동료들조차 이해하며 존중할 때, 마음과 육신이 너무 아파서 한 걸음도 걷지를 못하는 자를 부축일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속 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때문에 교우들에게도 일편단심을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인을 친 진짜 그리스도인이기에 정직함이, 신실함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기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나 믿을 수 있기에 때로 마음이 아픈 사랑을 해도 괜찮은, 아니 눈물이 나도 당연히 사랑하기에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주님이 거룩하니 나도 거룩해야 하고, 교회도 거룩해야 함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추구하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아끼고, 돌보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우리 주위에 자주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무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89 주일설교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2-18) 한태일 목사 2013-12-09 1786
588 수요설교 모세의 축복(신 33:1-5) 한태일 목사 2013-12-06 1791
587 주일설교 더 큰 영광의 사역(고후 3:7-11) 한태일 목사 2013-12-02 1673
586 주일설교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9) 한태일 목사 2013-11-25 1688
585 수요설교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신 32:36-52) 한태일 목사 2013-11-22 1618
584 주일설교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6) 한태일 목사 2013-11-18 1722
583 주일설교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고후 2:12-17) 한태일 목사 2013-11-11 1847
582 수요설교 영적 분별력(신 32:25-35) 한태일 목사 2013-11-07 1707
581 주일설교 진심으로 용서하면 모두가 복을 받습니다(고후 2:5-11) 한태일 목사 2013-10-28 2007
580 수요설교 하나님을 배반하는 백성(신 32:15-25) 한태일 목사 2013-10-25 1701
579 수요설교 반석 같은 하나님의 사랑(신 32:1-14) 한태일 목사 2013-10-17 2074
578 주일설교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2) (고후 1:23-2:4) 한태일 목사 2013-10-14 1852
577 수요설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막 10:28-31) 한태일 목사 2013-10-10 2465
576 주일설교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고후 1:15-22) 한태일 목사 2013-10-07 1865
575 수요설교 언약을 증거하는 노래와 율법책(신 31:19-30) 한태일 목사 2013-10-03 1740
574 주일설교 신앙 양심의 증거(고후1:12-14) 한태일 목사 2013-09-30 2011
1,,,5152535455565758596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