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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07-29 (목) 02:1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60    
[7/25/10] 주님의 말씀의 능력
주님의 말씀의 능력 (요한복음 4:43-54)

    동일한 주님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능력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말씀이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추수의 계절에 결실을 주셨어도 게으른 농부들에게는 그 열매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 농부는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천국의 열매를 거두는 일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틀을 사마리아에 머문 후 갈릴리로 가셨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별로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무 것도 거둘 수 없었습니다. 어디에 차이가 있었습니까? 말씀에 대한 열정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있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막는 걸림돌들을 치운 사람들과 그 걸림돌들을 그냥 내버려둔 사람들 차이에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길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3-45절)고 합니다.
    여기에 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자신이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고서는, 실제로 갈릴리에 가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는 갈릴리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열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은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마치 자신들을 대신하여 실컷 분풀이를 한 영웅으로 영접한 것이었습니다. 즉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하여 심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뒤집어 엎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갈릴리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늘 그렇고 그런 말씀, 다 자기들이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걸림돌이었습니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들이 좀 있었습니다. 누구 집 아들이며, 직업이 무엇이고, 나이는 얼마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주변에 친척 사람들은 누구며, 건강한 사람인지 아닌지 등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지식들이지요. 이런 내용들은 실질적으로 주님을 아는데 중요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실제로 주님께 나아가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그런 피상적인 지식은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집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기가 말씀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말씀의 축복을,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작 말씀을 들을 때에는 쓴 약을 마시는 것보다 더 얼굴을 찡그리거나 지루하다고 졸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뭐 좀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갈릴리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말씀에 열정을 가지고 집중하기를 축원합니다. 어렴풋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들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말씀을 받기 원합니다. 겉멋이 든 신앙의 거품을 빼시기 바랍니다. 모태신앙이라든가, 이전에 성경을 몇번 읽었다든가, 무슨 성경공부나 제자훈련반들을 끝냈다 하면서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한 줄 알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말씀의 능력을, 신앙의 성장을 가로 막는 걸림돌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치우고, 순수한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언제나 반드시 말씀의 은혜와 축복,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상황 속에 가버나움의 한 귀족,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기적을 베푸신 갈릴리 가나 동네를 지날 때에 이 왕의 신하가 아마도 열병으로 자기 아들이 죽게 된 것을 예수님은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절) 당시 가버나움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해롯 안티파스의 신하로 여겨지는데, 그 동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왕의 신하의 말을 들어주기 전에 먼저 갈릴리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즉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은 눈에 나타나는 기적이 없는 한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원한 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고 오직 눈에 나타나는 결과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무 표적이 없어도 주님의 말씀만 듣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믿음은 바로 이런, 아무런 기적이나 표적이 없어도 순수하게 말씀만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적이나 표적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사모하는 말씀은 믿음을 갖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 많던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면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요 20:29하)라고 하셨고, 성령의 감동으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였습니다. 보고서 믿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말씀을 통해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가 달려왔을 때 주님께서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말씀만 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이 한 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 신하의 아들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곳에 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지금 그 아이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말씀으로만 아이가 나았다고 하십니다. 그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떤 의심이 듭니까? ‘만약 안 나았으면 어떻게 하느냐?’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아이가 나았는지 낫지 않았는지 알 것이 아니냐?’ 하면서 의아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면 ‘싫으면 싫다고 하시지 어떻게 그렇게 말 만 하십니까?’ 하면서, 끝까지 귀찮게 매달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주위의 갈릴리 사람들은 다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50절하). 다른 아무 표적 없이, ‘만약 아이가 낫지 않으면 책임지겠다’ 라는 각서 한 장 없이 집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왕의 신하로 일하면서 왕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았기에, 만왕의 왕되신 주님의 말씀을 그저 순수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자기 집 하인들을 만났고, 하인들로부터 아들이 살았으며 열이 떨어진 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51-53절). 그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 온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아이가 살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 열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는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아무런 표적도 없이 멀리 떨어진 아이에게 즉각적으로 능력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결과가 있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먼저가 아닙니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주님의 말씀은, 아니 신구약 성경 66권은 단지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능력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혹시’가 아니라 ‘반드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면 그것을 하나도 의심하지 말고 전부 다 믿으십시오. 그러면 다른 것은 뒤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문제는 아무 어려움이 없는 안락함이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도 아들이 죽을 병이 걸렸기에 주님을 찾아왔고, 그 말씀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로서 자신도 어떤 권력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면 주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말씀도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이 있었기에, 자기 아들이 죽어가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주님께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주님께 나아오게 하는,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겸손해진다면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안락함,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병이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들이 우리를 주님에게로 적극적으로 나아가게 하며, 능력의 말씀을 붙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왕의 신하도 죽어가는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을 하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자기 집으로 와서 자기 아들 머리에 안수라도 하시면서 고쳐주시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에 자기 마음을 내어 맡겼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항상 자기의 방법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자기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교만으로서 자기 멋대로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내용에 대해 순종할 줄 모릅니다.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자리로 따라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는 왕에게 복종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주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도리입니다. 아니 그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잘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뜻에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태도요, 그게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 방법을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 성장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임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고집을 버릴 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순수하게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십시오. 과거에 여기 저기서 주어 들은 것들, 배운 것들 다 내려놓고 겸손히 어린아이와 같이 오늘 주시는 말씀을 붙드십시오. 반드시 그 붙드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결과를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주시는 말씀을 붙드십시오. 주께서 부르실 때에, 말씀하실 때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십시오. 역사하시는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안락한 삶을 즐기고 계십니까? 안일하게 사십니까? 어쩌면 영혼이 죽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침체에 빠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점점 주님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사탄의 역사를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에게 전부 맡기십시오. 내 생각, 내 방법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고집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방법대로,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주님의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빚어가실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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