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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0-08-02 (월) 09:1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82    
[8/8/10] 주님의 능력의 말씀(2)
주님의 말씀의 능력(2) (요한복음 5:1-9상)

    지난 주일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게 되어 주님을 찾아와 살려 달라고 했을 때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현장에도 없는 하룻길이 넘는 곳에 사는 그 아들이 그 시간에 고침을 받고, 온 집안이 주님을 믿게 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요 4:43-54). 오늘은 자그마치 38년이나 된 병자, 늘 침상에 누워지내던 병자가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거의 40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십대에 병을 얻었으면 지금 50대요, 20대에 병을 얻었으면 지금 60대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젊음을 불태우며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동안 40년 가까이를 누워서 전혀 아무 것도 못하고,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연명하면서, 아니 피해를 입히면서 인생을 낭비했던 자였습니다. 정말 아무 소망이 없는 지극히 불쌍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렇게 오래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묶였던 것을 풀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주권적인 은혜로 믿음을 주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녀 삼으시며, 얽매였던 것들을 풀어주시며, 여러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 지역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임을 나타내시는 두 번째의 표적을 보이신 후(요 4:54),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1절). 사도 요한은 무슨 명절이었는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아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마 오순절 아니면 유월절이었을 것이라고 성경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옛 서울에 4대문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루살렘 북쪽에는 어문(Fish Gate), 서쪽에는 망대문(Tower or Gennath Gate), 남서쪽에는 분문(Dung or Essene Gate), 남동쪽에는 수문(Water Gate), 동쪽에는 미문(Golden or Beautiful Gate), 미문 가까이 북동쪽에 바로 양문(Sheep Gate)이 있었습니다. 양문은 성전이 가까워 제물인 양과 염소가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양문 곁, 위쪽으로 베데스다 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2절).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함은 은혜의 집(House of Mercy) 혹은 물이 뿜어나오는 집(House of Outpouring)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 연못에 가끔 밑에서 물이 솟아오르면서 전체적으로 회전을 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한다고 믿고, 그 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다 낫게 된다는 소문으로 미신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마치 치료가 힘든 병에 걸린 사람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서 온갖 미신에 매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물에 들어가 치료받기 위하여 연못 옆 다섯 행각(기둥) 아래 많은 병자들, 다리를 못쓰는 사람들, 시각장애인들이나 지체장애인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물이 동하기를 밤낮 기다리고 있었습니다(3절). 사실 전혀 근거가 없는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성경 사본에는 3절 마지막 부분부터 4절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 괄호로 되어 있지요. NIV 영어 성경에는 아예 빼놓고 있습니다.
    사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미신적인 소문은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다리를 잘 못쓰는 사람들, 시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과 같은 중병이 걸린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니면 별로 심하지 않은 병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정말 고침 받기를 원하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제쳐놓고 먼저 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막연한 희망 속에 의미 없이 그 행각에 모여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곳에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이유는 무려 38년이나 중병으로 누워서 지내는 병자를 만나셔서 고쳐주시기 위하여 말입니다.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5-6절)! 주님께서 이 병자가 믿음이 있어서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있는 주님에게 이 사람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라고 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낫기 원하느냐고 하면 낫기 원한다고 했을 텐데, 이 사람은 낫기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소망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삶을 포기한 채, 절망가운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좌절감으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원망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원망만, “Life is unfair!” 라고 불평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에게도 이 좌절감, 실패의식이 문제입니다.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병으로 고생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나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치유 받아야 될 것은 심령의 회복입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실 때 ‘네, 낫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 혹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능력을 주시면 능히 나을 줄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아 멘!

    그런데 감사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이 38년 된 병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능력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절)!  이 병자는 주님을 알지도 못했고, 말씀에 대한 기대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냥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의 헛된 말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이 병자에게 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만 개인적으로 적용이 되는 꼭 필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일어나라”! 이 명령이 치료하시는 말씀이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안아서 일으킨 것도 아니요, 최면을 걸어서 일어서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일어설 수 있도록 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를 치워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병이 재발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말고 그저 믿음으로 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병을 고친다고 하는 자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못 고치면 병자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 병자가 “주여”라고 번역된 것은 좀 잘못되었는데,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Lord)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른을 공경하는 말로 어르신(Sir) 하고 부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믿음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로부터 치유를 받은 병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치유는 한번 고침을 받고 난 후에는 다시 재발하지 않는 완전한 치유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받은 은사라면 그래야지요.
    즉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기 위하여 우리의 도움이나, 우리의 허락이나, 심지어 우리의 믿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절대주권자이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없을 때에 우리가 갖고 있는 막연한 희망사항을 믿습니다. 그것이 신념이 됩니다. 미신까지 파고 들어서 생각은 더 복잡해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했을 때는 허망한 신념과 공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병자처럼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보시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을 너무 잘 아시고 계시며,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자리를 치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이 바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9절상)!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무려 38년을 누워지내던 사람이 치유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천사도 필요 없고, 자기를 물에 넣어줄 사람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이야말로 38년 된 병자의 처지에서는 굉장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행각에 모여 있던 많은 병자들 가운데 자기에게만 찾아오셔서 고쳐 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누가 그를 향해 ‘왜 주님께서 그 많은 병자들 가운데 당신만 고쳐주셨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나도 모르겠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따질게 못됩니다. 이것인 복음이요,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불러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지 수없이 물어보지만 대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아무 소망이 없을 때,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일어날 힘이 조금도 없어 포기하고 싶을 때 찾아오셔서 ‘일어나 걸어라’ 하시며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이런 찬양이 기억납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아 멘!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건강하고, 자식들도 잘 자라고,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편안할 때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처럼 지치고 곤하여 일어날 힘조차 없게 되면 주님께서 찾아와 손을 내미십니다. 일으켜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 은혜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정을 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죄인들이 아닙니까? 전적인 무능력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건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달라고, 우리를 붙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지난 주일 살펴보았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과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비교해 보십시오. 왕의 신하는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믿음이 없는 오늘 본문의 병자에게는 마치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가 넘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나중에 다시 그 고침 받은 병자를 만났을 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14절). 이 말씀은 아마도 이 사람이 병이 생기기 전에 방탕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물론 모든 병이 다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닙니다만, 이 사람의 경우에는 방탕한 생활로 인한 죄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38년 동안의 중병 생활보다 더 심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병이 재발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영원토록 지옥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또 죄 짓는 생활을 하게 된다면 이제는 38년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해도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이것은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으면 주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 몸은 죽은 몸이다’ 라고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나서도 도로 죄의 삶으로 돌아가서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받은 은혜를 쏟아 버리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인생의 큰 문제로 소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미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여러분들에게 물으십니다. ‘네, 낫기 원합니다’ 라고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이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음을 깨달아 믿고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능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처럼 세상 사람들은 물 속에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아 좌절감을 느끼며 아무 소망 없이 미신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살 것이 아니라, 지금도 능력이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자리에서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일어나 걸으시는 축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과거에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이미 받고 사시는 여러분! 정말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말씀을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때때로 쓰러질지라도 일으켜 세우시는 말씀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체험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 배설물로 여기셔서 치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한 미련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한 사람도 살려내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을 고치고, 살리는 주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종종 들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음성이 들리면 그 동안 우리를 싸고 있던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막혔던 담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빗나간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서로 등을 돌렸던 부부가 손을 잡고 화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난감하던 경제적인 상황이 풀려서 주님께서 길을 열어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음성을 들으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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