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75,933
오늘방문 : 2716
어제방문 : 28091
전체글등록 : 3,869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7-02-06 (화) 07:1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201    
[2/4/07]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4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4 (마가복음 10:35-45)
2007년 새해를 맞아 저는 여러분에게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일에는 빌립보서 3장 10-11절 말씀으로 사도 바울처럼 우리 모두가 올해는 주님을 본받아 자신을 죽이고 살자고 했습니다. 내 자아가 죽어야, 죄에 대하여 죽어야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내 이웃이 살고, 내 교회가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을 본받는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둘째 주일에는 디모데전서 4장 7절 말씀에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훈련하라고 하였듯이 우리 자신이 죽는 데에, 주님을 본받는 데에 필요한 것이 훈련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훈련(spiritual discipline)이 없이는 주님을 본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훈련 중에 가장 기초 훈련이 우리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 주일에는 히브리서 12:1-3절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승점이 분명히 있는 경주이므로 눈을 결승점에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서는 우리 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신 삶을 생각하며 자주 내 삶과 비교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조정할 것이 있으면 조정해야 합니다. 내려 놓으셔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묶어 놓는 것들, 무거운 짐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불신앙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집착하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포기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성도들, 주님 닮아가기 원하는 성도들은 자신을 내려 놓는 훈련, 포기하는 훈련을 잘 감당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자기 훈련(discipline)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면서도 모두가 바라는 것이기에 어떤 사람이 잘 감당하면 감탄하고 칭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훈련은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정말 경건하다는 것은 어떤 사람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훈련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항상 겸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또 다른 두 군데 성경을 찾아보며 이 겸손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본받는 데에 꼭 필요한 우리의 모습, 자세가 겸손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경건과 마찬가지로 겸손도 미덕(美德)이라기 보다는 훈련입니다. 아름다운 성품이요, 미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닮은 성품이 겸손이지만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오히려 교만하여 자존심이 강하고 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높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는 사람에게 굽실거립니다.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겸손하면 좋아하지만, 우리 자신 스스로가 낮아지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앞서서 9장 33-35절에 이미 예수님께서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12제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낮아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단지 미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생각하면 우리 앞에 놓여진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무엇이 되려는 것보다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떤 높은 지위나 명예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보다 주님을 닮고자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 되게 하는 것에 대한 그 책임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을 이야기할 때에 잘못 혼동하여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겸손은 자존감(self-esteem)을 낮추면서 자신을 학대하거나, 열등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한번도 자신을 학대하거나 열등감을 가지셨던 분이 아닙니다. 불안해 하셨던 분이 아닙니다. Humility is not a result of having poor self-image. 겸손은 내적으로 안정되고, 강한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겸손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아주 안정된 사람입니다. 주 안에서 자존감이 있고, 확신(confidence)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가지 요소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 겸손은 한 성품으로서 보다는 행동으로서, 자기 훈련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훈련을 말합니까?

첫째로, 겸손은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35절).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절) 합니다. 즉 왕되신 주님 옆에 하나는 좌의정, 하나는 우의정으로 세워주어서 권력을 누리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권력을 요구하는 그들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는 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38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셔야 할 고난의 잔과 십자가 죽음의 세례를 너희가 받겠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앞으로 그렇게 될 날이 오겠지만,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일이라고 하십니다(39-40). 누구가 되든지 예비된 자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다른 10제자들이 듣고 화를 내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아래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그들이 잘 알지만(42절)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3-45절)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미 9장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여기 세 구절에 나오는 두 동사에 주의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섬긴다(serve)’와 ‘주다(give)’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의 나라에서 경건은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본을 보이셨기에 고난의 잔을 말씀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세례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주님을 본받기 원합니까?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시작하십시오.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기십시오. 그 낮은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유명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William Barcley 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는 가능하면 적게 일하기 (섬기기) 원하면서 가능하면 많이 얻기를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들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오늘도 진실하고 겸손한 종을 찾기 원합니다. 제자들은 그 시간까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제자들을 생각해보면 겸손은 겸손한 사람 옆에 있다고 해서 내가 겸손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8장 3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이미 말씀하셨듯이, 아니 제가 첫째 주일에도 강조하였듯이 나를 부인하여야(selflessness), 고난의 잔을 마셔야,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은 감사로부터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부인하고, 종의 형체로 죽음에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셔서 나를 살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다면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주님의 희생으로부터 말미암아 내가 평안을 누리며 인생을 보낸다고 생각한다면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겸손히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주일에 보았던 빌립보서 2장 3-4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였듯이,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겸손하라고 명령하면서, 그에 따른 훈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희생하시면서 본을 보이셨는가를 5절부터 11절까지 설명하였습니다.
나를 위한 주님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희생과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으면 겸손할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없을 뿐더러, 남의 일을 돌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겸손은 믿음의 한 행동입니다. 본문의 야고보와 요한처럼, 사도 베드로도 힘들게 겸손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래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5-7)고 하였습니다. 단 세 구절의 말씀이 겸손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여기 동사 ‘동이라’는 종들이 걸치는 앞치마를 입을 때에 쓰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모습을 떠 올리면서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말 겸손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지요. 다른 사람을 향하여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베드로는 잠언 3:34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되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그의 축복을 즐기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주로 대적들 앞에서 그의 구원하심, 건지심을 상징하는 능력의 손을 말합니다. 그 능력 아래 나를 낮추면 때가 되면 높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결론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왜 겸손을 말하다가 갑자기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합니까? 베드로는 겸손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말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내 자신에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문제에 모든 것을 신경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겸손이 나 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돌보고 하는 훈련이라면 나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권고하신다”는 말은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에 관한 문제는 주께 맡겨 버리면 하나님께서 다 돌보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의 문제, 어려움을 돌볼 것 아닙니까? 내 자신에 대한 어떤 염려나 근심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믿음의 한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전체의 교훈을 두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시면 ‘겸손’과 ‘순종’입니다. 반대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과 불순종입니다. 바로 사탄이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교만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주셔서 겸손하게 하십니다. 연단을 통하여 겸손하게 되지요. 순종하게 하십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도록 빚어가시지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그 겸손과 순종의 본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본받자고 할 때에 겸손을 빼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겸손은 밑바닥으로 나를 낮추어서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그 희생을 감사한다면 겸손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크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돌보실 줄로 믿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겸손의 훈련을 잘 감당하여 우리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Well-being 에 관심을 기울여 섬기는 모습으로 우리 주님을 잘 본받게 되기를, 닮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210 주일설교 [10/26/08] 개혁주의 교회 한 태일 목사 2008-10-29 2295
1209 주일설교 [10/1/06] 각각 그 힘대로 한 태일 목사 2006-10-04 2285
1208 주일설교 [4/27/08]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한 태일 목사 2008-04-28 2276
1207 주일설교 [11/26/06] 섬기며 사는 삶 1 한 태일 목사 2006-11-28 2274
1206 주일설교 [2/13/05] 거듭나지 아니하면 한 태일 목사 2005-02-14 2274
1205 주일설교 [10/9/05]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한 태일 목사 2006-08-12 2250
1204 주일설교 믿음의 가정(1) (엡 5:22-33) 한태일 목사 2015-05-04 2234
1203 수요설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 한 태일 목사 2010-12-10 2234
1202 수요설교 역전의 인생이 쓰임 받으려면(수 8:24-35) 한태일 목사 2014-09-18 2227
1201 주일설교 [3/2/08] 우상들을 버리고 한 태일 목사 2008-03-03 2223
1200 주일설교 [3/25/07] 우리가 믿는 것 3 한 태일 목사 2007-03-29 2220
1199 수요설교 아골 골짜기의 심판(수 7:19-26) 한태일 목사 2014-08-22 2210
1198 주일설교 [6/8/08] 교회를 향한 애끓는 권고 한 태일 목사 2008-06-11 2210
1197 주일설교 [2/4/07]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4 한 태일 목사 2007-02-06 2201
1196 주일설교 [5/17/09] 축복 받은 가정 한 태일 목사 2009-05-19 2197
1195 주일설교 고난 후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자(4)(골 1:28-29) 한태일 목사 2017-01-23 2189
1,,,1112131415161718192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