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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6-02 (화) 07:4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99    
[5/31/09] 범사에 양심을 따라
범사에 양심을 따라 (사도행전 22:30-23:11)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도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conscience)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양심이 없는 행동, 양심에 어긋한 행동을 하면 교회가 비난을 받고, 예수님이 욕을 먹게 됩니다. 자기들은 양심을 따라 살지도 못하면서 적어도 교인이라고 하면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이 양심을 따라 살지 못하면 ‘증인이 되라’ ‘빛과 소금이 되라’ 라는 주님의 명령과 정말 거리가 먼 삶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의 몸이 죄성이 전혀 없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불완전한 우리들이기에 할 말은 있을지 몰라도, 그런 것으로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완전한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행동을 말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행동이나 양심이 굳은 행동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눈 앞에서 위선적인 행동, 이중 인격적인 행동, 거짓과 탐욕이 가득찬 행동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한 행동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23:1)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22장 후반부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의 간증을 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미움과 시기, 질투 속에 핍박을 받고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으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로마 사람으로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심문하며 채찍질하는 것은 잘못인 것을 천부장이 알고, 바울을 풀어주고 나서 정식으로 산헤드린 공의회를 모이게 하여 그들 앞에 바울을 세우고 자신을 변호하게 합니다(22:30). 그 때 그들을 향한 바울의 첫 마디가, 자신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절대로 어떤 없던 일을 날조해서 있었던 것처럼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22장에서 간증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이 사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도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간증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거짓말을 쉽게 하는 이유는 깨끗한 양심의 가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깨끗한 양심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 것은 거짓 없는 깨끗한 양심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잠시 위기를 모면하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양심을 팔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바울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또 다른 의미는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 신자가 되고, 복음 전하는 자가 된 것은 결코 양심을 저버린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무엇인가 심경에 변화가 생겼으며 결국 양심을 팔아먹고 유대교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하여, 혹은 경제적인 이득을 보기 위하여 양심을 팔아먹은 변절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자신은 결코 양심을 속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양심을 속인 것이 아니라 양심이 더 깨끗해졌습니다. 과거 유대교 밑에 있을 때 그의 양심은 죽어 있었고 병들어 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양심이었지 살아서 움직이는 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의 양심은 온전히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도 담대히 기도하며, 오히려 옛날보다 더 예민하게 죄나 더러운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가장 먼저 살아나는 것이 바로 이 양심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옛날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과거에 행한 부끄러운 거짓과 위선과 탐욕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회개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양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에게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는 말을 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2절)고 명령합니다. 여기 ‘그 입을 치라’는 말은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뻔뻔한 거짓말을 할 때, 그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막으라는 뜻입니다. 아마 뺨을 심하게 치든지, 얼굴을 때리든지 하면 더 이상 말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가만히 있지 않고 즉시 반발을 합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절) 회칠한 담이란 안에는 더러운데 겉으로만 하얗게 칠해 놓은 담을 말합니다. 당시 집이나 동네에 많은 양의 쓰레기가 버려져 있을 때에 쓰레기가 보이지 않도록 담을 치고 하얀 칠을 하여 위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흰 담을 쳐놓는다고 하여도 그 안에 있는 쓰레기 냄새가 안 나는 것도 아니고, 썩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위선적인, 겉은 하얀데 속은 새까만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어기는, 율법의 정신과 배치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당당하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너를 칠 것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굳어버렸는데, 양심이 썩어있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아나니아는 주후 59년에 면직되고, 66년에 한 유대 혁명가에 의하여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공동체든지 미래가 있으려면 일단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신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틀린 것은 틀렸다고 솔직하게 시인할 수 있는 정직함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교 공동체는 그렇지 못한 위선의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칠한 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날카로운 반격에 곁에 선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한다고 하니(4절),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했지만, 그래도 권위를 인정하기에 출애굽기 22장 28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인줄 몰라보고 비방하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도자에게 잘못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도리어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세 차례나 있어도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어느 사회던, 공동체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병드는 것입니다. 막가는 것입니다. 윗 사람을, 어른을,스승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우습게 알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미 망해가고 있는 징조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떨어지고, 학교에서 스승의 권위가 없어지고,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가 무너지고, 나라에서 대통령의 권위가 바닥에서 헤멘다면  아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아무리 악한 지도자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면 존중하고 순복하라고 합니다. 물론 주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하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존중하고 순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사과를 한 후, 바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한 말이 공회장을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6절 이하). 공회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이유인즉 산헤드린 공회는 지도자급이고 상류층에 속하는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두개파와 평민에 속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사두개파 사람들은 현실주의적이어서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오경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성전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전체를 신봉하며, 내세주의자들로 부활도 믿고, 천사도, 영도 믿는데 주로 회당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공회원들에게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를 두둔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 틈을 타서 로마군대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봐 걱정하여 무리 가운데서 그를 빼내게 됩니다(10절).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두 파 사이에 싸움을 붙이려고 자신이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을 믿는 것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말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그 주님이야말로 그들의 소망이라고 믿기에 증거하였습니다.
자신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죽었던 양심이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되어서 이제는 양심을 따라 떳떳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하여서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인간 본연의 양심이 회복이 되려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부패한 양심이 회복되려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귀의 형상으로 가득찬 교만을, 거짓을, 자기 자랑을, 자기 의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양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 때문에 내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을 한번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매일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우리 심령을 치유하시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된 양심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실제로 자신에게 일어났던 감동적인 간증을 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지만, 결국 동족들 사이에 큰 소동으로 번지고 자신은 겨우 천부장의 도움으로 도망 나왔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패배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실제로는 그 다음날 밤) 주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십니다(11절).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계속 바울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담대하라. 힘을 내라. 예루살렘에서 나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한 것 같이 이제 로마에 가서 증거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바울은 얼마나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며, 증거하며, 섬기며 살다가 낙심될 때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주님께서 옆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가 해야할 것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힘 주실 것입니다. ‘결코 실패가 아니다. 가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야. 담대하여라. 다시 일어나거라. 그리고 나을 위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하던 일을 계속하여라’ 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다시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그 다음은 우리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양심은 깨끗합니까? 허락하신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며 사십니까? 조금이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없습니까?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선적인 삶은 없습니까? 속은 새까만데 겉은 하얗게 칠만 하고 다니지는 않습니까?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못 속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심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처럼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매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에 주님의 피 묻은 손이 치유하실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하게 하십니다. 양심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는, 만났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계속 만나고 있는, 동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양심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세밀한 음성에 찔림이 올 때에 회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경향가든 교우들을 위한 저의 기도는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을 위한 기도와 동일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10-11)!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양심을 따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떳떳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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