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44,916
오늘방문 : 77
어제방문 : 17300
전체글등록 : 3,867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10-26 (금) 00:47
분 류 주일설교
첨부#1 aaapastor_hahn_28829.jpg (213KB) (Down:723)
ㆍ조회: 2103    
그리스도인의 결혼관(고전 7:1-16)




수년 전부터 미국의 중고등부 그리스도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순결서약 운동을 벌이며, 상징적인 반지를 끼고 다닙니다. 워낙 미국 사회가 성적으로 타락하여 순결을 버리는 것이 정상이고, 오히려 순결을 지키는 것이 비정상으로 여겨져 때로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한 여학생이 이 문제를 자신의 목사와 상담을 하게 되었고, 이 목사님이 학생들의 순결을 지켜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학교에서 성교육을 시킵니다. 우리나라도 수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적이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sex)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임신을 방지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오묘하신 비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여 임신이 되는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어쩌면 교회에서 성교육을 시켜야 제대로 가르칠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결혼관과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은 너무 차이가 있습니다. 독신 문제나 이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음행, 음란에 관한 문제로 바울에게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하도 고린도시 전체에 만연한 음행에 대하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1절상). 그래서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가까이 함이”라는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성관계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동일한 의미로 창 20:6; 룻 2:9, 잠 6:29 에서).
바울의 의미가 성관계를 갖지 않게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고, 결혼하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창조 시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은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독신의 은사도 주셔서 홀로 주를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절)고 합니다. 워낙 고린도시에 성적인 부도덕이 만연하기에 아내나 남편을 두어서 성적인 죄에 빠지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결코 결혼의 목적이 오직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결혼의 목적을 한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생육과 번성을 위해서입니다(창 1:28).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첫번째 명령이었습니다. 자손의 축복입니다. 둘째는, 즐거움을 위해서입니다(잠 5:18-19).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가서 전체가 이 부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동반자로 서로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부부 사이의 우정(friendship)이 행복한 결혼생활의 열쇠입니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결혼은 교회의 모습을 그려줍니다(엡 5:23-32).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교회(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교회이듯이, 아내의 머리가 남편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존중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한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감당했듯이,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순결을 위함입니다. 서로의 육체적인 욕구를 채워줌으로 성적인 부도덕으로부터,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줍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3-4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무”가 무엇이겠습니까? “주장한다”는 말은 권한이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 육체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의무와 권한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영적인, 정신적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의무입니다. 권리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의무, 혹은 권리는 서로에 대한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결혼한 다음에는 다른 여자나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결혼은 평생을 서로에 대한 헌신을 약속하는 것이기에 서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편은 자신이 선택한 아내를 결코 버리지 말고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각오가 있을 때 결혼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어질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심지어 부부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분방해서는, 따로 잠을 자면 안 된다고 합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5절)고 하였습니다. 대부분 부부들이 따로 방을 사용하는 것은 화가 나서 보기 싫을 때입니다. 그래서 화가 풀릴 때까지 딴 방에서 잡니다. 그러나 부부는 화가 나도 자기 전에 풀고 자야지 꼭 이겨야지 하면서 딴 방을 쓰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기도 제목이 있어서 서로 성관계도 중단하고 기도할 때에는 딴 방을 써도 된다고 바울은 생각합니다(6절). 유대인들의 관습에 금식기도하는 때나 특별한 절기 때는 부부가 딴 방을 썼다고 합니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고난 주간에 그렇게 딴 방을 쓰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난 주간에 부부가 서로 더 사랑하고 안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남편이나 아내가 특별히 회개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심한 죄책감으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될 때 서로 의논하고 합의하여 딴 방을 쓰면서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독신과 이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에 베드로는 결혼을 했기에 선교 여행에 꼭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여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독신이었기에 위험한 여행도 할 수 있었고, 목숨 걸고 주님의 일에 완전히 열심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독신이기를 원하지만, 독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라고 합니다(7절).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아닌데 혼자 살면서 유혹을 받는 자들입니다. 과부들입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8-9절)고 하였습니다. 요즘이야 미리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보고 여자이면 낙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남자보다 여자가 적지만, 당시에는 여자들의 수가 남자들 수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로 독신 여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할 수 있거든 자기처럼 독신으로 지내라고 권면합니다. 혹시 독신의 은사를 받았는지도 모르니까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도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독신의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자꾸 결혼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았기에 성욕을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라고 합니다. 완전히 주님의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자기가 하려던 일을 약간 포기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미 결혼한 부부들에게 명령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코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10-11절).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정해놓으신 한몸의 원리입니다(창 2:24). 한번은 자신을 시험하고자 모세의 율법에 이혼을 허락했는데 왜 예수님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5-9, 참고: 마 19:8-9, 막 10:11-12)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신 24:1-4)에서 이혼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악함 때문에 여자를 보호하기 위하여서 입니다. 만약 모세의 율법에 이혼이 전혀 안 된다고 했다면, 아마 싫은 여자를 매일 같이 힘들게 하여 못살게, 거의 죽게끔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좋아할 때에는 끝까지 쫓아 다닐 것 같다가도 한번 싫어지면 그렇게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이혼을 허락한 것은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마음대로 이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축복이고 비밀이지만, 인간의 죄성 때문에 저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명령 때문에 이혼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어서 갈라지게 되면 갈라지라고 합니다(11-12절). 제 생각에는 아마 남편이 계속 바람을 핀다든지, 알코홀 중독에 빠지든지, 도박에 빠지거나 해서 그 죄를 끊게 하기 위하여 갈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아내를 때린다든지 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갈라지더라도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살든지, 기다렸다가 회개하고 변화를 보이면 다시 화합하여 함께 살라고 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입니다(13-16절). 처음부터 믿지 않는 남자나 여자와 결혼한 경우가 아니라, 자신도 믿지 않는 상태에서 결혼을 했다가 믿게 된 경우입니다. 계속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가정이 불안하고 평화롭지 못하고, 자유를 잃게 될 바에는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이 노예 생활과 방불하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계속 살기를 좋아하거든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같이 살기 원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해서, 혹은 경제적인 무능이라든가 질병 등 다른 이유가 이혼사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배우자가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새 예배당에서 두 번째로 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종을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을 기억하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6:12-20). 새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하여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주일에는 우리의 가정, 특히 부부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그저 고린도전서 강해를 계속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결혼에 관한, 부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 부부 생활은 어떠합니까?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 몸을 이루고 산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신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남편과 아내가 교회를 섬기며 주를 위하여 산다면 우리 교회에 대한 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소문이 나겠습니까? 참된 부흥을 체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부 생활의 주된 것은 성관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세워주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주 앞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남편은 영적 리더로서 아내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리더로 인정하며 존경할 때 남편은 힘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독신의 은사를 주셨음에도 자꾸 결혼을 하려고 애쓰며, 마치 결혼이 전부인 양 노예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자유도 아니요, 세상을 위한 자유도 아닌 하나님을 위한 자유입니다. 아니면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기에 결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을 한 부부라면 서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권리이기도 합니다. 서로 육체적으로 채워주고, 정신적으로 채워주고, 더 나아가 영적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결혼이 결국 나에게 영적인 축복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부는 헤어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도저히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하게 배우자가 괴롭힐 경우, 죄 가운데 계속 거할 경우 잠시 헤어지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한편,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불신 배우자의 올무에서 속박 받으면서 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계속 살고자 원하면 헤어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미혼인 청년들이여, 절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매면 안 됩니다(고후 6:14).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전도하면 된다고 우기지 마세요. 거의 다 믿는 자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정히 믿지 않는 사람이 결혼하고 싶으면 상대방이 믿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뜻이면 그 사람이 회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178 주일설교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롬 15:22-33) 한태일 목사 2017-02-06 2128
1177 주일설교 [9/23/09] 수요예배-성도의 삶의 기준 정해경 2009-09-29 2128
1176 주일설교 [11/9/08] 정말 사랑하십니까? 한 태일 목사 2008-11-10 2121
1175 주일설교 [2/24/08] 예수와 또 몸의 부활 한 태일 목사 2008-02-25 2114
1174 주일설교 사랑의 속성(3)(고전 13:6-7) 한태일 목사 2013-06-10 2112
1173 주일설교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 16:1-4) 한태일 목사 2013-08-26 2109
1172 주일설교 [2/3/07] 능력있는 교회는 한 태일 목사 2008-02-04 2108
1171 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결혼관(고전 7:1-16) 한태일 목사 2012-10-26 2103
1170 주일설교 [12/13/09]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주님 한태일 목사 2009-12-14 2103
1169 주일설교 [9/6/09] 나와 같이 되기를 한 태일 목사 2009-09-08 2100
1168 주일설교 보배를 가진 질그릇(고후4:7-12) 한태일 목사 2014-01-27 2099
1167 주일설교 [5/31/09]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한 태일 목사 2009-06-02 2099
1166 주일설교 [3/22/09]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한 태일 목사 2009-03-25 2099
1165 주일설교 [12/31/08] 송구영신예배 한 태일 목사 2009-01-01 2098
1164 주일설교 [8/2/09] 고통이 계속될 때 한 태일 목사 2009-08-03 2097
1163 주일설교 [12/2/09] 수요예배 - 지혜자의 특징 한태일 목사 2009-12-04 2096
1,,,1112131415161718192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