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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6-10 (월) 12:0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11    
사랑의 속성(3)(고전 13:6-7)


지금까지 살펴본 아가페 사랑의 속성은 사람에 대해 오래 참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조차 온유함을 나타내며, 친절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은 시기, 질투하지 않기에 다른 지체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경쟁하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자랑하며 교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기에 예의를 지키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더욱 존중한다고 했습니다.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자극을 받더라도 쉽게 성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를 성내게 하는 사람들도 그 동기나 의도는 좋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악한 것을 머리에 기록해 두지 않고 빨리 지운다고 했습니다.

   열 번째 사랑의 속성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6절상)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불의를 행하든지, 다른 사람이 불의를 행하든지, 사랑의 사람은 결코 불의를 보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 유행하는 책들이나 잡지, TV 프로그램에서는 불의를 기뻐하며, 죄를 짓는 것을 미화하며, 부추기고 좋아하도록 하는 것을 봅니다. 각종 부도덕한 행동, 폭력, 범죄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말입니다. 막장드라마가 인기를 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들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가페 사랑의 순수함, 순결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면 분노합니다. 거룩한 분노입니다. 유명한 나이팅게일은 의사가 환자를 무성의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고 하며, 링컨 대통령도 흑인 여자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깨물며 분노했다고 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서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애통하고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불의를 적당히 넘길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불의를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핑계로 불의를 그냥 용납하는 것은 아직 아가페 사랑에 대하여 잘 모르는 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인도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용납한다는 것과 불의(죄)를 용납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은 죄인이지,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는 이 아가페 사랑을 체험하면서 진정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을 향한 그 큰 사랑을 갖고 계셨지만, 또한 우리의 죄를, 불의를 미워하시는 공의도 갖고 계셨기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 대신 희생제물로 삼으셔서, 그 주님에게 우리의 죄를 향한 모든 분노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그 후에야 아가페 사랑이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를 기뻐하면서, 아니 불의를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불의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가지고 불의를 미워합니다.
   불의를 기뻐하는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이 gossip 입니다. 남의 좋지 않은 소문을 기뻐하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이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gossip 은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약한 부분을 드러내며 부주의하게 말하는 것이어서 직접적으로 듣는 사람은 물론, 간접적으로 들은 사람조차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악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죄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즐기지 않습니다. 아니 미워합니다.

   열한 번째 사랑의 속성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동안 사랑의 속성 가운데 부정적인 것 8가지를 언급한 후에, 긍정적인 것 5가지를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6절하)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 1:6)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은 진리와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관계없이 상대방이 어떻게 살든지 일방적으로 베풀어주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이라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일을, 혹은 이 사람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랑입니다. 이것은 그저 자신의 부패한 감정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것만을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사실 교회의 하나됨은 진리가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온 교인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진리로 말미암아 영혼의 변화를 받았다면, 신구약 66권이 하나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한다면 저절로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풍성해야 할 것이 친목회나 단합대회가 아닙니다. 정으로 끈끈하게 맺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따끈따끈한 정이 넘치는 모임을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진리로 묶어져서 하나님 사랑의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된 교회를 원하신다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열두 번째 사랑의 속성은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시작합니다. 이 헬라어 원어는 4절 처음에 나온 “사랑은 오래 참고” 에서 사용한 단어와 다릅니다. 이 ‘오래 참는다’는 단어는 ‘어떤 자극 때문에 속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참는다는 단어는 ‘무엇인가 스며들지 않도록 단단히 막는다, 누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번역될 때에 주로 ‘자제하다, 보호하다, 혹은 덮다’로 됩니다. 따라서 4절에서는 참는 것을 오래하는 지속성을 강조했다면, 7절에서는 다양한 방해물에도 불구하고 자제하는 것, 그냥 덮어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오래” 참고 하였지만, 7절에서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즉 아가페 사랑은 무슨 달콤한 연애 감정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온갖 장애물을, 방해하는 것들을 다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이 여러 모양으로 핍박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공격들을 다 참고 견디셨습니다. 얼마든지 세상 권세를 이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거룩한 인격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임을 아셨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무슨 놀라운 기적이나 큰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책임과 의무를 온전히 이행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잘 참으려면 우선 하나님에 대한 강한 갈망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꼭 붙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모든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세상 즐거움을 다 버려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 사랑으로 충분하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와 사랑이 떨어져 사탄 마귀의 유혹에 흔들리고, 넘어져 참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가 그만큼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위대한 힘은 참 사랑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을 참기에는 여러분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은 약하지만 주님은 강합니다. 주님을 절대적으로 붙드시면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한, 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꼭 붙드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열세 번째 사랑의 속성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7절에 계속해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믿지 못할 것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도 언급했듯이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적대감을 품은 사람은 모든 것을 악의로 생각하려 하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미움은 모든 것을 불신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지만 믿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말이 안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다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한 지식과 판단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 사랑하기 좋은 것만을 믿어주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가페 사랑은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사랑하기 힘든 것, 사랑을 입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조차 사랑합니다. 즉 올바로 사랑하기 위하여 정확한 지식을,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려다가 쉽게 좌절하는 이유는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 없이 급작스러운 감정이나 우발적인 용기로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면 사랑의 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고, 어떤 장애가 있어도 지혜롭게 잘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의 사랑을 받을 대상을 위한 명령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명령입니다. 그렇게 믿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사랑은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열네 번째 사랑의 속성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쉽게 포기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세 번째의 “모든 것을 믿으며”가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라면, 열네 번째의 “모든 것을 바라며”는 현재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해서 분별이 없이 허황된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사랑으로 품고, 소망하는 것뿐입니다. 반대로 절망하는 것은 굉장한 악입니다. 만약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님의 못 박힌 손에 못질을 하는 것이라면,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칼이나 총을 들고 대드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직 소망을 갖고 계신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절망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사고방식이나 경험, 의견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시면 살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이 큰 죄악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의무만 있을 뿐, 인생을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탕자를 끝까지 기다리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아무리 실망을 시키고, 내가 베푸는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안돼,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어’라는 말은 거의 다 사랑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열다섯 번째 사랑의 속성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7절 마지막에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견딘다는 단어는 군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무장해제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큰 고통이 있어도 자신의 위치를, 자리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힘들다고 해서 무장해제를 하면 그 군인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에 ‘인내하다’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감당할만한 것을 감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참으며 견뎌내는 것을 말합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달콤하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달콤하기 보다 쓰디쓰며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습니다. 모욕과 멸시, 천대와 침 뱉음, 채찍질과 못 박힘의 고통에서 견디어내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의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사랑은 절대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죄를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좋아합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런 참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진짜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는 불신자들에게 쓴 편지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놀라운 은혜도 받았고, 은사도 많이 체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가페 사랑이 없는, 참 사랑이 없는 모든 영성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 사랑의 속성들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신비한 체험만 쫓는 그들의 태도는 도저히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십자가 사랑의 현재적인 경험으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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