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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02-25 (월) 22:3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14    
[2/24/08]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예수와 몸의 부활 (사도행전 17:16-21)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잘 살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 마음에 공허함을 채우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종교도 만들기도 하고,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고, 취미생활에 미치도록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인간의 내면 세계의, 그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리가 되어주지 않는 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사도 바울은 선교팀과 함께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길리기아, 더베, 루스드라를 거쳐 아시아로 가려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후에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반도로 떠나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 성에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고, 귀신들린 여종을 구해주고 빌립보 옥에 갇혔다가 찬송과 기도로 기적을 체험하고 나아와 그 간수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여 베뢰아로 가서 거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정말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 17:11).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쫓아온 유대인들이 소동을 부리며 난리를 치자, 형제들이 실라와 디모데를 나두고 바울을 바다로 해서 그 유명한 아덴에 이르게 합니다(15절).
아덴(Athens)! 즉, 아테네는 오늘날 프랑스 파리, 이태리의 로마, 영국의 런던, 이 미국의 뉴욕에 맞먹는 고대의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주전 5세기부터 헬라(Greece)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바울이 도착하였을 때는 비록 헬라제국이 로마제국에게 무너져서 그 찬란했던 황금기를 지나 쇠퇴기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당시 로마와 북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고, 철학, 문학, 예술 등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19절에 나오는 아레오바고 법정 옆에는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고 합니다. 웬만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게 건축한 웅장한 건물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는 유명한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제노가 살았었고 가르쳤었습니다. 인본주의인 헬레니즘(Hellenism, Humanism)의 본산지였습니다. 인간중심의 사상이 만연했던 곳입니다. 본문에도 그 예가 나오는데 바로 사도 바울과 변론을 한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입니다. 에비구레오(Epicurean), 즉 에피쿠로스 학파는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2-270)가 창시하여 인간의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이 세상 삶이 전부이며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상처를 줄이고 살고자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If it feels good, do it. If it doesn’t feel good, stay away from it. Avoid what hurts. 오늘날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를 즐겁게 하는 쾌락주의자들 말입니다. 하나 뿐인 인생, 한번 밖에 없는 내 인생 내가 즐기자며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한편 스도이고(Stoic), 즉 스토아 학파는 철학자 제노(Zeno, B.C. 340-265)가 창시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이 세상에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있어서 그것을 피할 길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를 주장합니다. 모든 정욕을 금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보다 이성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자신의 지성을 의지하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욕심 부리지 않고 살면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연과 조화하며 살고 나쁜 일, 어려운 일을 만나면 스스로 이를 물고 참아내면서 자신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 사상과 철학이 득세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테네에는 우상신들이 엄청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아테네 인구가 약 3만 명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이 잘 아는 제우스, 주피터, 비너스, 아데미 등을 비롯하여 우상신이 3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리를 지나 다니면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우상신을 만나기가 더 쉬웠다고 합니다. 거리에는 제사 향의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칼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인본주의 사상이 극심한 곳에 각종 신들을 만들어 섬겼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바울이 아테네의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많은 우상신을 만들어 믿어 보아도, 그것으로 그들의 영혼을, 내면 세계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그 많은 우상들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이 말장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바울과 쟁론하면서도,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19-20절)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1절에 보면 모든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과 거기 거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는 시간을 딴 데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 것을 원했고, 이상한 것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갖고 있는 사상이나 우상신에게서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 것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새로운 것만 찾는 인생에게는 공허함이 더해갈 뿐입니다. 물론 시간적인 새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적인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질적인 새로움을 창조해 내지요. 타락하고 부패한 죄성을 대체하는 성령님의 거룩함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시간적 새로움에 대한 흥미를 고리로 해서 질적으로 새로움을 가져다 주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합니다. 물론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이를 18절에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다고 합니다.
정말 범신론(Deism)을 믿고 있기에 수많은 우상신들을 믿고 살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로 살던 그들에게 유일신 사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철저한 신본주의를 전파하니 그들에게 이상했고, 새롭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내세를 믿지 않고 있던 그들에게 내세가 있고, 우리 육체가 죽으면 다시 부활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새로운 신으로, 부활(anastasis)은 헬라어로 여성명사이기에 남성명사 예수의 주된 여신으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그 많은 우상신들 가운데 하나입니까? 정말 기독교도 그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정말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을 믿으십니까? 그리하여 여러분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믿으십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십니까? 그 주님을 여러분의 심령에 모셔 들이고 사십니까? 정말 그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 만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 내면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실 분입니다.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요 4:3절 이하).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유대인이 상종하지도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니 이상히 여기자 생수(living water)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로 아무리 채우려고 하여도 다시 목마를 수 밖에 없으나, 예수님의 은혜로 채우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장사 지내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믿으십니까?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부활하심을 증거하시고 말씀을 나누신 성경을 믿으십니까? 아니 우리도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8-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전 4:16-17)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고 하셨습니다. 여기 선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악한 일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8-29)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삽니까? 사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염려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영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분명히 죽음 이후의 영원한 내세가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날이 반드시 옵니다.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런데 우리와 달리, 오늘 본문의 아테네의 사람들처럼 많은 이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 내면 세계의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비록 쾌락을 추구하고 살고, 자기 욕심을 채우며 살고, 자기 중심으로 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영혼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영혼이 있기에 육체적인 것이 채워진다고 해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잘 사는 것 같아도 다 내면의 공허함을, 목마름을 채우기 위하여 별별 노력을 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별 수 없습니다. 또다시 목마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우상을 만들고 섬기며 살지만 그 우상들이 그들의 영혼을 만족하게 못합니다.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보면 그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말하는 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종교들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허무주의자로 삽니다. 쉽게 절망하고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영혼들을 볼 때에 정말 안타깝게 여겨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의로운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탄, 마귀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사탄, 마귀들을 향하여 진노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그런 분들이 없습니까? 전하십시오. 좋으신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몸의 부활을 전하십시오. 짧은 인생,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다가 가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안개와도 같은 짧은 인생과 비교도 되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변화를 받고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게 됩니다. 회복하게 됩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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