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40,286
오늘방문 : 12847
어제방문 : 10789
전체글등록 : 3,867
오늘글등록 : 1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8-26 (월) 08:0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09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 16:1-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도 물질에 탐심을 계속 갖고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믿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에 자유란 있을 수가 없고, 아니 자유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는 그들의 Checkbook 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헌금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John Wesley 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돈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들의 그 회개를 믿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부활에 대하여, 특히 성도들이 주님 재림하실 때에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에 대하여 길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마지막 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 부활의 소망을 주심은 현재 이 땅에서의 삶에서 더욱 신실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눈과 눈을 맞대고 영원히 살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면서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16장에 들어와 성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실제 삶에서의 예물을 드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도들을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1절)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연보”는 쉽게 말하면 헌금을 가리킵니다. 즉 헌금의 목적은 성도들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문맥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기근 속에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자신이 개척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들에게 어려운 교회를 도우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당시에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제법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하여 다른 교회들처럼 연보를 거두어 보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것과 가까이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소위 착하다는 사람은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구제를 합니다. 또 종교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선하다고 생각을 하여 사회에서는 그들이 하는 선행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선행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치료하는 곳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말씀으로 치료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영혼의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물론 영혼이 치료된 사람들이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는 것이 옳지만, 선행 자체가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돕는다는 것은 평범한 선행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을 살리고, 병들었던 영혼이 치유함을 입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성령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성도들을 도와서 그들이 힘을 내고 일어서도록 하며,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는 제자를 삼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성도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함께 섬기는 교회 운영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아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헌금을 위하여 기도를 하거나,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것에 대하여 세속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물질이라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열심히 일해서 번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진액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물질 속에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과 하나님께서 주신 직업과 사업체의 기회를 잘 선용하는 성실함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만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바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예물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것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는 것이 물질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히 인색한 헌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삶에서 고백한다면 하나님 앞에 풍성한 헌금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딤 6:10).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여 돈의 노예가 되면 절대로 하나님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도박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뇌물을 받는 등 정직하지 않은 돈은 헌금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거나 헌금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소득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께 드려보아야 받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힘입고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면서 성도들이 벌은 돈을 가장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땀이고 눈물이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인생을 사용하여 벌어들인 물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쳐질 때, 그것은 곧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 중에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시간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물질 문제에 있어서 매우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라고 해도 떳떳했습니다. 그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살아도 자신보다는 늘 다른 교회들을, 동역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연보를 요청했습니다.
   이민 교회에서도 그런 분들이 있는데, 일본 교회는 대체로 목회자들이 full time 사역자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가 약해서도 그렇고, 목회자 스스로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 교인들이 늘 교회의 손님처럼 남게 되고, 교회의 부흥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선교 역사가 우리 나라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미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짧은 선교 역사에도 놀랍게 성장한 한국 교회들은 장로 제도가 미친 영향이 크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이 섬기는 교회에 대하여 내 교회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재정적으로 책임을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한국 교회의 교세가 쇠퇴하면서 이 장로제도가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이제는 재정적인 책임도 별로 지지 않으면서 어깨에 힘만 주고 교회를 좌지 우지 하려고 한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만이 아니라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교회라는 책임감 속에 재정적인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2절)고 하였습니다. 헌금의 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매 주일 첫날, 즉 주일에 예배를 드렸고, 예배 시간에 각 사람이 헌금을 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이 첫 날을 언급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와 교제로 모인 날이 이 날, 주의 날이기 때문입니다(참고- 행 20:7; 계 1:10). 그래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안식일 토요일이 아니라, 주님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2절에서 “각 사람”이라는 말은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그리고 “이를 얻은 대로”, 즉 장사해서 이익을 남긴 대로 모아두었다가 헌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헌금하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초신자들이나 헌금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매 주일 감사 헌금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헌금 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십일조와 주일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주님 것이어서 바쳐야 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이 있어야 하겠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내는 헌금이 십일조입니다. 그것은 정말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것들 중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감사헌금은 형편에 따라, 감사의 제목을 따라 드리는 헌금입니다. 그리고 주일헌금은 주정헌금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자신이 매 주일 정해서 드리는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되지도 않은 돈, 그냥 주머니에서나 지갑에서 푼돈을 내는 사람은 헌금의 정신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거지가 아닙니다. 동냥하듯이 헌금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만합니다. 자기 자녀들에게는 너그럽게 돈을 주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자녀보다도 못한 것이지요.
   바울은 이 후에 보낸 고린도후서에서,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5-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다 성취가 됩니다. 기독교 2000여 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경험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3-4절)고 하였습니다. 3절에서는 헌금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 구절들은 교회에서의 헌금 관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줄 수도 있지만, 고린도교회가 인정한 신실한 사람에게 편지와 함께 갖다 주라고 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신실한 사람들이 재정을 맡아서 감당해야 합니다. 입이 무거운 신뢰할 사람들을 선정해서 맡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직회에서 교회의 재정 상황에 대하여 투명하게 보고가 되어야 합니다. 제직들이 알 권리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모든 교인이 알아야 하기에 공동의회에서 결산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사람들은 헌금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시험에 들거나 하여 모이는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가 돈을 위해서 설교한다면, 돈에 욕심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반드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헌금에 대하여 정직하게 설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목사에게, 우리 교회에 많은 영혼을 붙여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려고 하는 목사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고 오늘 16장 차례가 되어서 본문 말씀을 풀어 해석하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돈이 필요해서 오늘 본문을 설교하는 것 아닙니다. 아니 모든 것 다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돈이 필요해서 오늘 성경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떡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대로 전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고, 지켜야 할 바를 지키도록 할 뿐입니다. 그것이 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고(막 12:41-44), 또 죄인인 한 여자가 엄청나게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었던 일을 칭찬하신 것처럼(마 26:6-13; 막 14:7-9; 눅 7:37-39; 요 12:1-8),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부자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보다 부자이면서도 연보에 인색하기에 바울은 두 서신에서 각각 연보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달리 극한 가난 속에서 고통 받는 마게도냐 교회였으나,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고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런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였습니까? 성경은 그 비결이 “넘치는 기쁨”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인하여 넘치는 기쁨이 있었기에 이렇게 넘치는 연보를 드리는 삶이 가능하였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기에, 환란과 시련보다도 더 큰 사랑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모여 살아도 기쁨이 있는 교회, 많이 배우지 못한 교인들이 모였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어 무슨 일에든지 자족하는 교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있는, 말씀의 능력이 있는 교회에는 언제나 넘치는 헌신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병든 영혼이 치료를 받습니다. 상한 심령들이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도 똑같이 헌신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표현합니다. 그래서 찬양을 드리고, 우리의 중심을 바치고, 기도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기에 그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을 하며 진리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정성껏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마음을 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으로 올바른 헌금 생활을 하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고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178 주일설교 [1/27/08]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한 태일 목사 2008-01-28 2128
1177 주일설교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롬 15:22-33) 한태일 목사 2017-02-06 2127
1176 주일설교 [11/9/08] 정말 사랑하십니까? 한 태일 목사 2008-11-10 2121
1175 주일설교 [2/24/08] 예수와 또 몸의 부활 한 태일 목사 2008-02-25 2114
1174 주일설교 사랑의 속성(3)(고전 13:6-7) 한태일 목사 2013-06-10 2111
1173 주일설교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 16:1-4) 한태일 목사 2013-08-26 2109
1172 주일설교 [2/3/07] 능력있는 교회는 한 태일 목사 2008-02-04 2107
1171 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결혼관(고전 7:1-16) 한태일 목사 2012-10-26 2101
1170 주일설교 [12/13/09]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주님 한태일 목사 2009-12-14 2100
1169 주일설교 [9/6/09] 나와 같이 되기를 한 태일 목사 2009-09-08 2099
1168 주일설교 [3/22/09]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한 태일 목사 2009-03-25 2099
1167 주일설교 보배를 가진 질그릇(고후4:7-12) 한태일 목사 2014-01-27 2098
1166 주일설교 [5/31/09]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한 태일 목사 2009-06-02 2098
1165 주일설교 [12/31/08] 송구영신예배 한 태일 목사 2009-01-01 2098
1164 주일설교 [12/2/09] 수요예배 - 지혜자의 특징 한태일 목사 2009-12-04 2096
1163 주일설교 [8/2/09] 고통이 계속될 때 한 태일 목사 2009-08-03 2096
1,,,1112131415161718192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