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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9-08-03 (월) 23:5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96    
[8/2/09] 고통이 계속될 때
고통이 계속될 때 (사도행전 25:1-12)
우리 인생이 평탄하지만은 않기에 종종 고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아픔이 계속될 때는 참 견디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고통이 계속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자포자기 하십니까? 누구를 바라보십니까? 주위에 의지할 사람을 찾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여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옥한흠 목사님께서 쓰신 “고통에는 뜻이 있다”라는 소책자가 교계에 베스트 셀러로서 많은 성도들에게 읽힌 적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헛된,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만 하면 오히려 큰 축복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그 뜻이 있음을 믿고 견디면 우리를 성숙하게 하며, 더욱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고통은 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고통 자체는 싫지만 그 고통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그에게도 계속되는 고통이 있지만, 담대하게 대처하는 모습과 그 고통 뒤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아무 죄도 없는데 벨릭스 총독은 2년이나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새로 베스도 총독이 팔레스틴 지역에 부임하였습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그는 주후 59년에 부임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그 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총독들은 해변에 건설된 아름다운 항구도시 가이사랴에 살면서 팔레스틴을 통치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어서 일년 내내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로 인한 피비린내와 타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고, 유대주의자들의 관습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제 부임한지 3일만에 예루살렘으로 베스도 총독이 올라갑니다(1절).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총독의 공식적인 부임 행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을 또 고소하는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만납니다(2절). 그들은 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지금 바울을 죽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총독이 바뀌자 다시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또 고소합니다. 아마 베스도 총독은 유대 지역 사정에 그리 밝지 못하다고 여기고 그를 이용하여, 지금 가이사랴 감옥에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을 해달라고 청원하면 받아들일 줄 알고 요청합니다(3절). 물론 사실 이것은 음모였습니다. 이미 로마 시민권자를 로마법에 의하여 재판을 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처벌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2년 전에 암살단을 조직해 살해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마음 먹은 것입니다(23:21). 그들이 그 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결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깨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겠지만, 바울을 죽이려는 각오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그들의 청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4-5절). 그들의 요청에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이 곧 가이사랴로 가니 그들도 함께 가서 또 송사를 하면 재판을 거기서 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가이사랴로 내려간 후에 다시 바울을 데려다가 재판을 하게 됩니다(6-7절). 2년 만에 재개된 재판에서도 그들의 고소가 아무 증거가 없음이 드러납니다. 7절에 여러가지 중대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8절에 기록된 바울의 변호에 의하면 이전에 고소한 내용과 동일한 ‘율법을 범한 죄, 나사렛 예수의 대한 도, 부활, 성전을 더럽힌 죄’ 등으로 생각합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8절)고 합니다. 그러나 이 베스도 총독도 이전 벨릭스 총독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9절). 지금 막 팔레스틴 지역으로 부임을 받은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미움과 원성을 사기 원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재판 장소를 옮기게 해달라는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완전히 거절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든지 재판 장소는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때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10-11절)고 합니다.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로서 언제든지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재판을 받도록 상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 총독도 어쩔 수 없이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니라”(12절)고 합니다.

자, 바울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가 옥살이를 2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전 벨릭스 총독이 바로 판결을 하였더라면 그는 벌써 풀림을 받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핍박을 받고,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이제 새 총독이 왔으니 좀 나아질까 생각했는데, 마찬가지 입니다. 그야말로 한결 같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까? 두 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며, 율법을 지키는 의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는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들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는 다고 하니, 인간의 의를 부정하고 전적인 타락을 외치고 있으니까 너무 화가 난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신념 전체가 무너지는, 전통이 무너지는 것이었으니 바울을 그토록 미워하며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바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미워한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전한 도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 복음이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나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알기에, 비록 아직 죄성을 가진 죄인의 모습이지만 그 믿음을 보시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며, 자녀 삼아주신 그 은혜가 감사하여 선한 일을,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이 계속 고통을 당하는 두번째 이유는 로마 총독들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고 싶은 것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것 때문에 그가 무죄인 줄 알면서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올바르게 판결을 내리다가는 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자리까지 위태로워질까 해서 바울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대부분의 이유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위 사람들이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의, 나의 자존심도 건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인기를 누리고 싶은 욕망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나는 인정 못 받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정신적인 고통과 그에 따른 육체적인 고통 이외에도 많은 고통들이 우리 삶에 있지만, 본문의 바울의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그를 2년 넘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 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고 빚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가 죽어지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다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왜 이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2년 전에 그랬더라면 그 때에 이미 그는 가이사 앞에 갔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3차 전도여행이 끝난 후 로마에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9:21). 하지만 자신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로서 자유로운 몸으로 로마에 가서 1차, 2차, 3차 전도여행 때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2년이 넘는 수감 생활 후에 이제야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수의 몸에서 쉽게 풀려날 수 없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차라리 로마 황제 앞에서 벨릭스에게 한 것처럼 자신을 변호하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비록 죄수의 신분으로 가이사 황제 앞에 가지만 로마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로마의 관리들과 로마인들 앞에서, 황제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유로운 몸은 아니지만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을 얻었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2년 넘게 끌어온 재판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나타내는 본문의 말씀입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바울의 기나긴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되는 고통의 시간에는 반드시 우리를 향한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믿음이 있다 해도 짧은 고통은 잘 견디지만 계속되는 고통을 잘 이길 장사는 없습니다. 안 좋은 상황이 끝나야 하는데 끝이 안보이면 거의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으로, 죄성이 발동하여 불신자들과 똑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 뿐만 아니라 주위에 사람들도 너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고통을 겪지 않으면 내려놓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못된 기질이 바뀔 수가 없습니다. 계속되는 그런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더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욱 성숙해 지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말입니다(신 32:11).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로마 총독들처럼 여러분 자신의 의를 자꾸 드러내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누군데, 내가 이런 착한 일, 좋은 일을 했는데’ 하시면서 자꾸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하고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어서,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여러 모양으로 애쓰십니까? 그러다가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여져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리하여 나도 고통스럽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게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원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많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그 은혜가 아닙니까(엡 2:1)?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저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16세기 스페인의 수도사이며 시인이었던 John the Cross 는 이런 기도를 남겼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 예수님!
저를 건져주십시오.
사랑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칭송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높임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선호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의논의 대상이 되려는 갈망으로부터,
인정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인기 얻으려는 갈망으로부터 건져주십시오.

오, 예수님!
저를 건져주십시오.
모욕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업신여길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책망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잊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비웃음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사랑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건져주십시오.

오, 예수님!
은혜를 베푸셔서 이런 갈망을 갖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존중 받기를 바라는 갈망을,
세상의 기준에서조차 다른 사람이 더 높아지고 저는 더 낮아지기를 바라는 갈망을,
다른 사람이 선택받고 저는 제외되어도 되기를 바라는 갈망을,
다른 사람이 칭송을 받고 저는 주목받지 않아도 되는 갈망을 주십시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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