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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11-10 (월) 23:2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21    
[11/9/08] 정말 사랑하십니까?
정말 사랑하십니까?(마태복음 22:34-4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주적으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가 사랑일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 이 세상 삶에서 가장 위대한 덕목이라고 모두다 믿고들 있습니다. 이유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사랑이 가장 위대한 것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며 말하고 느끼는 사랑보다는 훨씬 크고, 넓고, 깊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여러모양으로 시험하여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하였지만(22:15-33), 오히려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임을 증명하는 사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다시 바리새인들 가운데 율법사(lawyer) 하나가 또다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시험하는 질문을 합니다. 공개적으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36절) 라고 말입니다. 이 율법사의 의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시대의 보편적인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노출시키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로서는 수준이 맞지도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율법의 개념은 복수(laws)가 아니라 단수(Law)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든, 헬라어든 ‘율법’이라는 말은 단수로 늘 쓰입니다. 그 율법 속에 많은 계명들이 들어있지만 계명이 하나씩 따로 존재할 수 없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계명들 전체를 하나의 율법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정말 올바른 마음으로 질문을 한다면 ‘예수님,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라고 하여야 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묻는 질문 이면에는 큰 계명과 대조되는 작은 계명이 있어서, 큰 계명은 열심히 지켜야 되고 작은 계명은 하찮게 생각해도 좋다는 듯한 당시의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실 율법사들은 율법을 이렇게 나누는 데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 이었습니다. 모두 613개의 계명으로 나누고, 그것을 또 긍정적인 계명 248개, 부정적인 계명 365개로 나누어서 나름대로 큰 계명은 애써 지키고, 작은 계명은 하찮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성경적이라기 보다 그들의 편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큰 계명이 따로 있고, 작은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서 큰 계명과 작은 계명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것을 세심하게 나누어 큰 계명을 지켰을 때에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작은 계명을 어겼을 때에는 별로 가책 받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실 모든 계명 그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려는 태도, 그 마음, 즉 동기입니다.
율법사의 질문이 말도 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말도 되지 않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시고자 하였습니다.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오히려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태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37-39절)! 유대인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의 쉐마(Shema)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신실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 번씩 쉐마를 암송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의 계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중요한 계명이면 십계명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계명 자체들 중 하나이기 보다는 모든 계명을 지키는 원리입니다. 즉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 방식과 원리를 계명의 형태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는 도덕을 다루는 십계명 등 도덕법(Moral Law), 성전에서 여러가지 제사 의식을 다루는 의식법 혹은 제사법(Ceremonial Law), 공동체를 이루어 가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생활을 다루는 시민법(Civil Law) 등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크건 작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계명을 순종해 나아갈 때, 그것들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과 실천하는 사람의 마음 속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째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 경험으로도 이러한 사실들은 입증됩니다. 처음 주님을 진실로 만나 첫사랑에 온전히 사로잡혀 살아가던 처음 경험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었습니까? 사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신 30:6).
사랑은 계명의 크기를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아주 작은 계명을 어겨도 깊이 애통하며 몸부림칠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달라도 그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계명이 크던 작던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불순종은 죄이고, 죄는 그것이 크던 작던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칼을 꽂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청교도 목사요 신학자였던 John Owen 은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크게 생각하던 작게 생각하던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가슴에 들이내민 칼이 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을 배반하고 범죄한 사실 자체가 거룩한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죄에 대한 태도는 그의 영성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본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라는 표현은 마음이 무엇을 뜻하고, 목숨이 무엇을 뜻하고, 뜻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별하여 하나씩 다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유사한 말을 반복함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강조하여 전달하고자 사용하는 당시 히브리어 사람들의 어법입니다. 이 표현은 우리의 전부, 전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 정, 의를 총 망라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언제든지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를 주님의 지상 대명령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존재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하게 만든 원동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랜 세월 섬길수록 주님이 더욱 사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지기는커녕 마음이 강퍅해져 가고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는, 무디어지는 일은 없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사랑이 식어져 더욱 뻔뻔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볼 때입니다.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은 홍역과도 같이 단 한번 뜨겁게 사랑하다가 식어지는지 몰라도, 하나님 사랑의 경험은 일생 동안 반복될 수 있고 또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랑이든지 그 본질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요 인격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나 독실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사랑의 정서의 본질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연인에 대하여 불 같은 사랑을 느껴보았고,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 희생하고자 하는 사랑을 경험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는 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서는 따로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한 인격 안에 두 대상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을 모르는 말입니다. 반드시 어느 하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하나에 대한 사랑에 종속되게 마련입니다. 이 사실에는 동의하면서도 많은 신자들이 이 사실을 삶으로 부인하고 삽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무엇 무엇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라는 변명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통적인 변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타납니다(출 20:5; 나 1:2). 우리는 우리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의식 세계를 넘어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며 인격의 특징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잃어버리고 나면 즉시 깨닫습니다. 그 상실이 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린 그 순간에 고통이 찾아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거기에 마음을 바칠 때 우리 영혼의 고통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질투는 상처를 주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버림받게 하시거나 상실하게 하심으로 그것들과 맺은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무엇으로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아시기에 우리를 세상 사랑과 결별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러한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기도 혹은, 예배에 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멀어진 사람일수록 기도생활이, 예배생활이 멀어집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사랑이 없을 때에는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모아지고, 뜻이 모아지고, 목숨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싶은, 대화하고 싶은 갈망에 깊은 기도의 세계를 원합니다.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가진 욕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을 지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 죄의 짐을 다 벗기신 후에 우리를 그냥 곧 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짊어질 멍에가 있는데 그것을 지면서 쉼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멍에는 어떤 것입니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굳게 믿고 실천하기로 다짐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자유케 하는 멍에를 진 것입니다. 죄의 짐 밖에 진 적이 없는 우리들이 주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키며 살겠다고 약속한 것이 결코 쉬운 멍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때때로 하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모든 것으로,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든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종된 사람은 속박대신 자유를 느낍니다. 다만 그 사랑이 식어질 때, 멀어질 때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사 같은 질문이나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39절; 레 19:18) 하신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번째 계명은 처음 계명과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한 가족을, 형제를, 자매를 용서하고 감싸주고 돌보아 준다는 말입니까? 거짓으로 사랑하는 척 할 뿐이지요. 역겨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였습니다. 즉 사랑은 사랑하지 않을 때 불가능하던 것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모든 수고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세상 끝 날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지막 40절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강령’ 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박힌 못’입니다. 즉 무슨 옷이든지 벽에 박힌 못에 걸려 있을 때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무슨 계명이든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못에 걸려 있지 않으면 마치 땅바닥에 떨어진 의복과 같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아십시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 피로 우리를 구해주신 사랑입니다. 어느 문학작품이든지 ‘사랑’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죽음’입니다. 사랑과 죽음은 진지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죽음이 진지하듯이 사랑도 장난일 수가 없습니다. 이 놀라운 피의 사랑 뿐만 아니라, 자녀 삼으시고 아버지로서 계속하여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구별된 정결한 삶으로 그 분 사랑하기를 배우십시오. 당신을 구하는 자에게 새벽 햇빛과 같이 일정하게 나오시는 하나님, 그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생애가 그 분 밖에는 사랑할 이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전 존재가 그 분께만 바쳐진 생애가 되도록 힘씁시다. 어쩌면 신앙생활은 사랑싸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을 달라 하십니다. 하루 하루 먹고 마시며 숨쉬며,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데, 우리도 이 세상에 오직 주님 밖에 없는 것처럼 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날마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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