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40,616
오늘방문 : 13177
어제방문 : 10789
전체글등록 : 3,867
오늘글등록 : 1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1-27 (월) 08:4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99    
보배를 가진 질그릇(고후4:7-12)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를 하거나 과소평가를 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자신을 과대평가를 하면서 거만하거나 자만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존감(self-esteem)이 낮아서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 혹은 겸손한 척 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거나 멸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겸손한 모습이 아니고,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사는 분들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늘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자녀로서, 위대하신 목자가 돌보는 한 마리의 양으로서, 아니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존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만이 아닌 올바른 자아상, 자존감을 갖고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자신들의 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분명히 자신들은 질그릇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7절). 여기 “질그릇”이라는 원어의 뜻은 그야말로 진흙으로 굽은 그릇을 말합니다.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그릇입니다. 구약에서 욥이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었습니다(욥 10:9; 13:12). 어떤 분은 이 질그릇이란 표현이 기드온 용사들의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삿 7장). 이해가 되는 것이 삼백 명에 불과한 기드온 용사들이 수많은 미디안 군대와 싸우기 위하여 나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만 하나씩 들고 나오도록 했습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나팔과 횃불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항아리를 깨뜨리면서 나팔을 불고 횃불을 들었을 때 수많은 미디안 군사들이 두려워 떨며 서로를 죽임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사역자들과 오늘날의 교회(성도들)는 질그릇, 곧 항아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능력입니다. 정말 보배들 중의 보배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복음의 영광의 빛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적으로 치장하고 포장해도 우리 속 사람은 죄성으로 부패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불러주시기는 하지만,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기 전까지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인간들입니다. 유한한 생명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 보잘 것이 없는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보배는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을 부수고도 남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기 때문에 귀한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드온 용사들처럼 승리한다 하여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여도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엄청난 분이며, 그 영광의 복음의 빛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조금도 염려하거나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경험했습니다. 그들을 핍박하고 어렵게 하여 목숨까지 위태한 지경을 통과했지만, 이 보배로 말미암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8-9절) 하였습니다. 여기 “우겨쌈을 당하다”라는 말은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압박(pressure)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연약한 질그릇이라서 그러면 깨질 것 같은데 “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서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다”라는 말은 고난 가운데 무엇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릇 한 구석이 부서져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핍박을 받아도 버림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홀로 당하게 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거꾸러 뜨림을 당하다”는 말은 레슬링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넘어뜨릴 때 사용하던 단어로 그들을 공격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비방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넘어졌다 하더라도, 결코 패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망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연약해도 보배를 품고 있기에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패배하지 않습니다. 잠깐 넘어지는 것 같아도 오뚜기처럼 일어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아니 그런 핍박 가운데 믿음은 더욱 강해집니다.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 붙들고 좁은 길을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가 심하게 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때로는 파도가 너무 거칠어서 배를 삼킬 것 같은데도 잠시 후에 보면 배는 건재합니다. 비록 어떤 때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도 결국에는 목적지를 향하여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믿는 성도들의 삶은 이 세대를 거슬려 역류하는 삶이기에 평탄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세상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주님 앞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냥 이 세대를 따라 적당히 흘러간다면 별로 힘들 것이 없습니다. 아무 일 없이 그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가다가 마지막에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커다란 폭포를 만나 추락하게 됩니다.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간 배는 결국 살아 남습니다. 그리고 그 배에 함께 탄 자들도 모두 살아 남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에는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죄 가운데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아니 보배를 담지 않고 세상에 빠져 그냥 즐기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지금이라도 속히 보배를 그릇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이 세대의 물줄기를 거슬러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이 그렇게 세상을 거슬러 살 수 있는 비결을, 파도를 이겨낼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 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10절)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우리 자아가 죽어야 영광의 복음의 빛이 더욱 환하게 비춘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우리 안에 있는 진리의 보배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 짐”은 원어로 직역하자면 “죽어가는 예수를 항상 몸에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하였듯이, 자신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에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처럼 산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하심으로 주님의 참된 제자라면 그렇게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때에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야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11절)고 한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문구가 “육체를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절하)고 한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죽을 육체에 보배로운 예수의 생명이,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자아가 살아있고, 야망을 따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면 보배로운 예수의 생명이,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아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살려고 하면 진리의 보배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아무것은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무슨 일을 했어도 ‘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앞서 언급한 내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질그릇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진흙으로 만들어진 약한 그릇입니다.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그릇입니다.
   이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육체에 대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생명을 소망한다면, 부활을 소망한다면 그렇게 죽어져야 합니다. 부서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4-9)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12절)고 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으면, 생명의 역사가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으면 그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아무리 금이나 은과 같은 것으로 그릇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금 그릇이라고 해도 그 안에 밥을 담아 놓으면 그냥 밥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금이나 은이 아니면서 금이나 은으로 과대 포장을 하고 그 안에 더러운 것으로, 썩어져 냄새 나는 것으로 채우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 죄인이라서 아무리 좋은 것으로 포장을 해도 쉽게 깨져버리는 질그릇임을 모르고 살아가니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분들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질그릇 안에 다 헛된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거리로 가득 채우고 사니 더욱 불쌍합니다. 그러다가 무슨 큰 일을 만나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결국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 전에 보배를 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히 깨끗이 그릇을 닦고, 그 안에 보배를 담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배를 담는다면 그 그릇은 보배로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다면 아무리 누가 엎지르려고 하고, 부서뜨리려고 해도 절대로 엎어지지도, 낙심하지도, 부서지지도 않습니다.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보배이신 주님이, 진리의 말씀이 붙들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능력으로, “빛이 있으라”(창 1:3) 했더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놀라운 창조의 능력과 구속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빛이 역사하려면, 능력이 나타나려면 질그릇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늘 기억하고 죽어져야 합니다. 자아를, 육체의 정욕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되살아나려고 하면 그 때마다 죽여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보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십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알 때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공감이 가는, 동의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분들의 가치를 알 때, 우리와 함께 하는 자연의 가치를 알 때 행복해진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자가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상)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보배를 가졌다면, 영광의 복음의 빛을 가졌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때로 그 가치를 몰라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비록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그 안에 너무 귀중한 보배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178 주일설교 [1/27/08]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한 태일 목사 2008-01-28 2128
1177 주일설교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롬 15:22-33) 한태일 목사 2017-02-06 2127
1176 주일설교 [11/9/08] 정말 사랑하십니까? 한 태일 목사 2008-11-10 2121
1175 주일설교 [2/24/08] 예수와 또 몸의 부활 한 태일 목사 2008-02-25 2114
1174 주일설교 사랑의 속성(3)(고전 13:6-7) 한태일 목사 2013-06-10 2111
1173 주일설교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 16:1-4) 한태일 목사 2013-08-26 2109
1172 주일설교 [2/3/07] 능력있는 교회는 한 태일 목사 2008-02-04 2107
1171 주일설교 그리스도인의 결혼관(고전 7:1-16) 한태일 목사 2012-10-26 2101
1170 주일설교 [12/13/09]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주님 한태일 목사 2009-12-14 2100
1169 주일설교 보배를 가진 질그릇(고후4:7-12) 한태일 목사 2014-01-27 2099
1168 주일설교 [9/6/09] 나와 같이 되기를 한 태일 목사 2009-09-08 2099
1167 주일설교 [3/22/09]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한 태일 목사 2009-03-25 2099
1166 주일설교 [5/31/09]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한 태일 목사 2009-06-02 2098
1165 주일설교 [12/31/08] 송구영신예배 한 태일 목사 2009-01-01 2098
1164 주일설교 [12/2/09] 수요예배 - 지혜자의 특징 한태일 목사 2009-12-04 2096
1163 주일설교 [8/2/09] 고통이 계속될 때 한 태일 목사 2009-08-03 2096
1,,,1112131415161718192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