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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5-03-16 (월) 09: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91    
의롭다 하심의 결과(롬 5:1-11)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결과는 무엇일까요? 좀 다르게 표현하면, 구원을 받은 결과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많은 복을 주십니다. 그것들을 잘 알고 있어야 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복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몰라서 누리지를 못한다면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여태껏 로마서 1-4장까지 세상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고, 또 실제로 진노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해결책을 허락하셨는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죄 속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제 5장에 들어와서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적대관계로 서로 원수였다가 화해를 하게 되었고, 교제가 회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고 하였습니다. 사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 화목하게 되어 교제하게 되었다는 것만큼 큰 복은 없습니다. 어쩌면 암 환자에게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이나, 사형선고를 받은 범죄자에게 ‘사면이 되었습니다’ 라는 소식보다 더 복된 소식입니다. 이유는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 버렸기 때문에, 도저히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을 예수님께서 갚아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서(10절) 창조주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얼마든지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들어감을 얻었다”는 단어는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구약의 성도들과 달리, 오늘날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하기만 하면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책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성전의 지성소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2절하). 여기 “바라고”라는 단어는 확실한 기대(an assured expectation)를 말합니다. 마치 복권을 사고 당첨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가냘픈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으로 내일 영화를 볼 수 있는 티켓을 구입하였다면, 내일 분명히 영화를 보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타지로 출장을 간 아버지가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는 확신으로 기다리는 아들이 만날 것을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구원을 받은 사람은 확실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기대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대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평(화목)하게 된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얼마든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자주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송을 하며, 예배를 드립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히 기대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까? 하나님을 자랑하고 사십니까?

그리고, 환란이 와도 즐거워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라고 하였습니다. “환란(tribulation, pressure)”이라 함은 압력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눌리는 것입니다. 즉,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문제로 말미암아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그것을 능가하는 기쁨이 속에 있기에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환란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질 유익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으로, 마음 속의 교만을 수술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으로 알고, 환란을 견디면서 인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내(perseverance, remaining under)”라는 원어의 뜻은 ‘압력을 받으면서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 입니다. 참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쩔 줄 몰라서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은혜스럽게, 위엄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내하면 연단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 “연단(proven character)”이라 함은 시련을 거쳐 가치가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정련된 순금처럼 말입니다. 즉 인내는 사람의 인격을, 성품을 순전하게, 가치있게, 성숙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말입니다. 확실한 소망 때문에 말입니다. 연단이 소망을 더욱 붙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절)라고 하였습니다. 적극적인(긍정적인) 사고방식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물론 이렇게 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하였습니다. 연약할 때라는 말은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즉 타락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기약대로”, 즉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아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부어졌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확실해 졌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8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의인이라 함은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서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선인은 남에게 도움과 유익을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드물지만 혹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위하여, 충신이 왕을 위하여, 부하가 상관을 위하여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입니다. 왕입니다. 죄가 없으신 의로운 분입니다. 그런 분이 종을 위하여, 신하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악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높고 높은 곳에 계시는 위대한 분이 전혀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는 우리를 위하여 말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이 바퀴벌레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입니다. 무슨 병아리도 아니고, 사람에게 유익한 개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미물을 위하여 죽는다고 말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독생자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증하기 위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음을 알면서도, 그 이후에 살아갈 때에는 자신의 생각과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천국에 가는 티켓만 주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 성도는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경건하지 못했던 자신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그 큰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사랑하며 삽니다.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보려고 애씁니다. 아니 앞날의 소망, 주님을 다시 만날 뵐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라도 내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이 와도 인내하고, 연단이 되어 점점 주님을 닮은 성숙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9-10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동사는 원어에 완료시제를 사용했습니다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 동사는 미래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은 아직(yet)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시면 우리의 몸조차 죄성이 없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변하여 죄를 전혀 모르는 완전한 의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이런 진리의 말씀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환란 중에서도 말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승리의 기쁨입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죄와 슬픔과 죽음과 고통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삶의 초점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내 중심을 살면 안됩니다. 내 주위의 환경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살면 안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선하신 계획이 무엇일까 묻고, 그것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삶을 태도가 벌써 다릅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연민에 빠진다든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저 겸손히 자신을 내려 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 주시는 놀라운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그 평화와 기쁨이 날로 더해갑니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이 됩니다.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여러분의 열악한 환경이나 상황이 여러분을 주장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인치신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환란 위에서(above sufferings)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십시오. 내 생각, 내 능력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신뢰하십시오. 이미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화목하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룰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유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십시오. 그 특권을 누리고 가능하면 자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간구하십시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자녀이기에 마음 놓고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책임져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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